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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이어질 편지

답답할 것 같은 여름에 보내는 여덟번째 편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알고 싶다는 그대에게 

 

 

 

하이얀 치자 꽃이 만발한 제주의 푸른 바다를 굽이도는 길을 걸으며,
분주하고 험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한 켠에 이처럼 한가롭고 아름다운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에 놀라웠습니다.

미국의 서부를 옮겨놓은 듯 번듯하게 잘 자란 로열팜트리가 열병 분열하는 기사처럼 늘씬하게 서있고
애틀랜타에서 보았던 바로 그 망골리아 꽃잎이 부서져 내리는 잿빛도로를 달리면서,
한 편으로는 끝없이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면서
또 한쪽으로는 인본주의의 극치로 자연을 애써 가꾸는 가진 자들의 양면성에,
작은 탄식이 교차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초여름인가 했더니 어느새 찜통 더위가 사람들을 괴롭히지만
자신은 사우나를 즐기듯 뜨거움을 즐긴다는 그대의 서신 속에 배어난 의연함을 읽었습니다.
 
어떤 환경도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침범할 수 없다는 단호함의 표현일 거라는 제 나름 대로의 해석을 붙여 보았다면 좀 지나친 해석이라 할 수 있을지요.
 


섬을 둘러싼 바다 못지 않게 구름바다 광활한 제주의 하늘을 가로질러 서울에 돌아온 그날, 그대의 답신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삶의 진정한 가치 속에서 자신의 가치
즉 자신이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生)의 원리를
조금은 발견했다는 그대의 짧은 글을 읽어 내리는 동안,
언젠가 빈들에 서서 갈 길을 묻던 그대의 우울한 영상이 한 순간 스러져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 영적인 세계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구요.

그대의 질문에 대해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체계 있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제 생각이 이론으로 정립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 삶의 현장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건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한 세계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떠온 그대로,
 
그대와 함께 대화의 창문을 열어볼까 합니다.

 

어떤 시인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향기도 없는 바람,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더욱이 만져지지도 않는 바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바람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나뭇가지의 흔들림으로 ..."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어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영의 세계라는 것은 결국 보이지 않으나 반드시 존재하는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영이시니(God is spirit) 신령(in spirit)과 진정(in truth)으로 예배드리라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한 사도는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결에 푸른 잎사귀와 꽃잎들이 흔들리듯이...

사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From the dust of the ground)
그 코에 생기를(the breath of life) 불어넣으시니 생령(living soul)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원래 먼지(dust)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흙도 아닌 먼지, 도무지 생명력을 가지지 못한 먼지는 흙과는 다릅니다.
흙 속에는 각종 미생물과 영양이 함유되어있어 씨앗을 틔우는 창조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먼지는 다르다고 합니다.
아무리 꽃씨를 오랫동안 먼지 속에 파묻어 놓아도 새싹은 나지 않듯이
원래 우리의 본질은 창조력과 생명력과는 관계없는 진토,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은 전적 부패와 전적 타락을 말했으며,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여호와께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것은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that we are dust) 기억하시기 때문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먼지와 같은 존재가 생명을 가질 수 있게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호흡이 불어넣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신만이 아닌 영(spirit)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에덴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본능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본능의 결과가 결국 여러 종교와 철학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러나 종교와 철학에 심취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 허무와 혼돈과 고독의 늪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 그대와 내가 바로 증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토록 우리를 혼돈과 어두움 속으로 몰고 간 존재가 무엇입니까.


이 땅의 어떤 종교 원리와 논리로도 규명하지 않았고,
규명할 수도 없는 사탄의 존재,
그 영적 존재의 실체에 대해 오직 성경만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창조되기도 전,
하늘에 전쟁이 있어 교만한 천사 루시퍼가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이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이름은 사탄이요,
온 천하를 꾀는 자이며(요한계시록 12:7-9),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고,
영화로우므로 지혜를 더럽히며 성소를 더럽힌 자가 만민의 경계거리가 될 것이라고 선지자 에스겔은 말하고 있습니다(에스겔 28:14-29).

하늘에서 떨어진 자, 열국을 엎은 자(이사야 14:12-15),
사탄은 뱀을 이용하여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함으로써 죄와 사망과 저주, 재앙 가운데 인간을 멸망케 했으며(창세기 3:1-5)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가 되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결국 실패하게 할 뿐 아니라,
갖은 궤계를 써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열시키는 자로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불붙은 화살을 쏘아대어
미움과 분노와 오해와 갈등과 낙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엡 6:11-16).

더욱이 사탄이라는 존재가 영화에서 보듯이 뿔 달고 검은 망토를 걸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철학과 유전과 우리의 사상과 문화를 타고 교묘하게 파고들기 때문에 깨어 경계하라고 고린도 교회와 마게도니아 교회를 향해 바울은 더불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사탄이라는 존재는 우리의 마음을 미혹하고 혼미하게 합니다.
육신과 정신을 눌러 병들게 하며,
사탄의 회(Synagogue of Satan)를 조직하여 끝없이 인간을 공격하고 대적합니다.
이 가증한 영적 존재에 대해 민감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실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생의 근본적인 불행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어제는 한 부인을 만났습니다.
지혜롭고 영특하며 사랑스런 부인입니다.
남편 또한 착하고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서로 원수가 될 만큼 분노할 대상은 아닙니다.
더욱이 그 부인도 고독하고 남편 또한 너무 고독한 나머지 끝없는 방황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울면서 말했습니다.
결단 내리겠다고,
이제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오직 분노할 뿐이라구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이상하다. 고독한 사람끼리 만나면 그 고독이 사라져야 할 텐데 왜 이들은 더욱 고독하며 끝없이 방황하는 것일까..."

그렇습니다.
태초에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감격으로 하와를 사랑했던 아담으로 하여금
책임전가와 핑계와 사랑의 유기로 말미암아 두려움과 저주와 재앙을 초래하게 만든 사실적인 존재는 바로 뱀으로 가장한 사탄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실재하는 사탄,
그 미혹의 영은 오늘도 버젓이 살아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를 파괴합니다.


사탄이라는 존재는 저를 격앙시키는군요.
지금까지 운명이라고 제쳐두었던, 지난날의 고통과 고독, 어둠을 가져다준 바로 그 대적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다소 흥분되는 것 같습니다.
그대가 알고 싶어하는 영적인 세계,
그 비밀한 세계에 대해 좀더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하면서 이만 펜을 놓습니다.
 

2000.7.5
답신을 기다리며
그대의 영혼을 사랑하는
이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