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이어질 편지

" 이 시대의 외로운 싸움 - 노아의 방주 짓기 "

언제나 그 자리에 2007. 2. 28. 01:10
 

흔히들 이 시대를 일컬어 말세라고 말합니다.
멸망의 날이 가까웠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어나는 일들이 참으로 대책 없이 한심하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노아시대가 꼭 이랬나봅니다.
사람들은 밤이나 낮이나 온통 나쁜 일을 도모하고 생각하고 상상했습니다.(People thought evil, imagined evil-evil, evil, evil from morning to night : 창 6:5 -The Message)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혼합되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기에 바빴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떠난 가인의 후예들이 일삼던 퇴폐적 아리따움에 빠져 깊은 타락의 늪으로 빠졌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을 창조주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는 경건의 삶은, 언약의 보혈인,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로 이어지는 예배의 축복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비밀인 임마누엘의 삶을 그 내용으로 한다고 볼 때,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빠져 악한 영의 지배를 받았던 노아 시대의 타락이야말로 바로,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인류의 전적 타락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창조의 기쁨 대신에 깊은 후회로 마음이 아프셨던 하나님은 죄악의 관영함 앞에서 공의의 심판을 내려야 하는 깊은 고뇌에 빠지셨습니다.
하지만, 죄를 미워하시되 인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하나님은 결국 구원의 창구를 열어 놓으시고 그 시대에 의로운 자, 노아를 불러 방주를 짓도록 명하셨습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에나하메누’에서 비롯된 ‘안위하리라,’ 또는‘ 편안하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패역한 시대에 마땅히 임할 재앙을 앞두고 하나님은 120년이라는 유예기간을 두심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올 시간을 주시고(창세기 6:3),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게 함으로써 다가올 홍수 심판에 대비하도록 피할 길을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하늘 아래서 살아 숨 쉬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쓸어 없앨 터이니,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시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6:13-7:1)

재앙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계획과 그 ‘안위하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노아가 짓는 방주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습니다.

하늘이 청청한데, 큰 비가 올 거라며 배를 짓는 사람이 있다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한 데다,
그것도 이 만 톤 급이나 되는 큰 배를 백 년 넘게 산위에서 짓고 있다면 당연히 제 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취급당할 것입니다.

이 시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외로운 싸움, 그 싸움은 오늘 날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철학과 이론과 초등학문은 백주 대낮에 웬 사단이고 악령이냐고 말합니다.

최첨단 과학기술로 화성도 가는데 인간이 스스로 살 길을 마련해야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종교적 편파주의라고 무시하거나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고후 4:4, 고후 11:14, 골 2:8)

노아의 시대나 이 시대나 ‘네피림’의 시대입니다.
네피림이라 함은, 그 어원이 ‘떨어진다’란 뜻의 히브리어 ‘나팔’에서 유래된 것을 근거로 하여,
하늘에서 쫓겨난 타락한 자, 또는 습격하는 자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고, 거인, 장부(giants)라는 말로 쓰여 지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로 쓰여 졌던,
힘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 시대,
거대 권력과 거대 재력을 가지고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이 시대의 배경에는 분명,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인류의 삶을 도적질하고 훔침으로써 재앙과 저주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 할 때,
이 시대 또한 노아의 시대요, 네피림의 시대임이 확실합니다.

그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침묵을 깨고 대홍수 심판의 준엄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사십 일 밤과 낮 동안에 하늘의 모든 창들이 열리고 이 땅의 모든 깊은 샘물이 터져, 온 지면에 흘러 넘쳤습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간 노아의 8식구와 하나님이 지정하신 육축 이외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 모두 - 그 어느 것 하나도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의 언약으로 주신 창세기 3장 15절,
여인의 후손 예수그리스도 - 하나님 만나는 유일한 길이시며,
사단의 올무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진리이시고,
죽음에서 우리를 건지신 생명이신 그리스도(요한 14:6),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음을 밝히 말하는,
그 유일성에 대하여 전면 대적하고 나서는 혼합주의(syncretism)를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네피림의 주역인 사단과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말세에 이를 심판에 대비하여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방주를 지었던 노아의 사명은 곧 오늘날 성도의 사명이며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 우리는, 노아와 같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불감증이 만연하여,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가 어두워져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신분과 권세를 회복하여 삶의 현장 속에서 흑암 세력과 싸움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 시키고 그리스도의 권세를 약화시키는 비 진리와,

이단 사이비 종교집단을 분별할 수 있는 통찰력과 분별력을 구해야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을 떠나 두려움에 눌려, 우상을 섬기고 미신에 빠져서,

자꾸만 가중 되는 문제 속에서 현실을 이기지 못하여 정신적 고통과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우적대는, 이 시대를 긍휼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종말과 시대의 종말은 물론,

지구의 종말에 대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시대, 노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주께로부터 부르심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응한다고 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구원의 방주를 짓는 과정 속에서 세밀하게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

튼실한 잣나무와 역청으로 넘치는 홍수의 재앙을 막으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노아와 그 가족과 육축의 떼를 방주 안에 넣으시고 문을 닫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창 7:16)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믿음 가운데 있기만 하면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로 믿음을 주시고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의 믿음대로 행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빌 2:13)
하나님께서 문 여시면 닫을 자 없고, 닫으시면 열 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외로운 싸움에 이와 같은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참으로 편안하게 합니다.

k.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