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이어질 편지

다말,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랴

언제나 그 자리에 2009. 9. 22. 12:45

다말,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랴

 

(성경을 통해 보는 복음 - 서른여섯 번째)

 

 

 

 

인생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완전히 망가진 유다의 가정 이야기를 성경은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으니, 율법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 만큼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유다의 기구한 가정사는 첫 단추를 잘못 꿰듯, 그가 형제들 곁을 떠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아둘람 사람 히라와 교제하다가 이방 여인 수아를 만나 결혼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상,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넷째인 유다는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갈 복음적 장자로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가 특별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의 시기로 인하여 동생 요셉이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피를 흘리지 말고 손을 대지 말자’고 조언했던 그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생명 살리는 일이 되어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7:26∼27)
 
 

원래 야곱의 배에서 난 육신적 장자는 르우벤이었으나 그는 아비의 침상을 더럽혀 장자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창세기 49:4, 역대상 5:1). 유다가 언약적 장자로서 받을 축복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에게 손을 얹어 이렇게 예언합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세기 49:8~10)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홀’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함은 그의 후손을 통해 만왕의 왕으로 메시아,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실로’는 평화를 말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져 사탄의 통제아래서 살아가야 할 온 인류를 향해 화평의 손을 내밀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의 길을 여신 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시기까지 유다의 후대를 이어가실 하나님의 중대한 계획이 선포된 것입니다.


만물이 그 발 앞에 복종하여 무릎을 꿇어 우리의 찬송이 되실 그리스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하여 에덴의 축복을 빼앗아간 우리의 대적자, 마귀의 목을 잡아 그 일을 멸하기 위하여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가 그의 계보를 따라 오시겠다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유다는 이미 와있는 응답과 축복을 가볍게 여기고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켜야 할 하나님의 사람은 언약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부터 인생의 장애물이 그 길을 가로막기 시작합니다.



큰 아들 엘은 극악하게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고뭉치입니다.(grievously offended God-The Message 창세기 38:7)
그러나 우리의 인격이나 도덕적 행위와 상관없이 절대적 주권 가운데 언약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문에 임하여 다말이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유다의 며느리가 됩니다.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척박한 사막에 기적처럼 드리워진 종려나무, 그 나무가 있는 곳이면 으레 존재하는 오아시스는, 목말라 죽어가는 순례자에게 생명수를 제공합니다.

 

 



다말…, 이름 그대로 싱싱한 종려나무처럼 사랑스럽고 건강한 그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메시아로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나무에서 번제를 드려 대적의 문을 취하였던 기적의 역사를,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받아 누렸던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그리고 야곱이 받았던 벧엘의 축복은, 어릴 적부터 그녀가 미래를 꿈꾸며 들어왔던 하나님의 스토리였던 것입니다.

 

그 역사 속에서 방관자가 아닌 적극적인 주인공으로 살리라 마음먹었던 여인, 다말이 유다 가문의 가족이 된 것이야말로 축복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하던지 메시아의 길을 방해하고자 하는 사탄의 궤계는 그녀를 사람들 보기에 ‘재수 없는 여자’로 몰고 갑니다.

첫 번째 남편 엘의 망가진 삶 속에서도 묵묵히 고통을 이겨나가는 다말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남편의 생명을 거두어갑니다.

그러자 시아버지 유다는 가문의 후손을 보존하기 위한 전통에 따라 둘째 아들 오난을 명하여 다말을 아내로 취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난은 자신에게는 유익도 없이 형의 씨를 생산해야 한다는 억울함 때문에 땅에 정액을 쏟아버립니다.

이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하여 그만 그도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어린 셋째 아들 셀라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을 불러 이르기를 어린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수절하며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순종하여 친정으로 돌아간 다말, 그러나 시아버지는 그로부터 감감 무소식입니다.


그중에 유다의 아내 수아가 죽자 외로워 상실감에 빠진 유다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보다는 이방 사람 히라를 찾아가 위로를 얻는가 싶더니 그와 함께 죽이 맞아서 에서 족속들이 살고 있는 딤나로 올라갑니다.

임도 보고 뽕도 딴다고 양털도 깎고 창녀도 만나 외로움도 달래보리라 친구와 둘이서 은밀한 계획을 세운 겁니다.


이것을 알게 된 다말, 그녀는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치밀한 행동에 들어갑니다.
창녀로 분장한 그녀는 외로운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하룻밤 사랑의 대가로 유다의 가문을 상징하는 끈과 지팡이와 도장을 손 안에 넣습니다.

이것은 불에 태워져 죽어야할 간음죄의 형벌로부터 그녀를 구하는 징표가 되어서, 시아버지 유다를 무릎 꿇어 참회시키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베레스는 다윗 왕의 조상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을 이었습니다.

다말의 노래를 들어 보십시오.
이 노래를 듣는 이, 누가 그녀를 향하여 돌을 던지겠습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섰습니다.
칙칙한 과부의 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불타오르는 빛깔의 베일을 골라,
윤기 흐르는 긴 머리채를 부드럽게 감싸고
상기되어 붉어진 뺨을 깊숙이 가린 후,
여전히 선이 고운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험난한 시간들을 지나왔지만, 백합처럼 순결한 영혼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여호와, 그분의 약속을 품었기에…,
술에 버무려져 살았던 첫 남편과 함께 했던 고통의 순간들도,
오직 애욕에 묶여, 내 육체만을 탐하는 두 번째 남편의 곁에서,
밤새 떨어야 했던 그 치욕과 상실의 순간들도 이제는,
마치 정화된 불순물처럼 깨끗이 승화되어
오직 나의 영혼에 아름다움을 더 할 뿐입니다.


이제, 딤나로 가렵니다.
푸른 잔디 무성한 그 곳에서 양치기들의 흥겨운 노래가 울려 퍼지고
보송보송한 양무리들이 털을 깎으려는 목동들 앞에 줄지어 설 때,
난…, 에나임 성문에 앉아 나의 시아비를 기다려 유혹하려 합니다.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패역한 여인이라 하실 건가요…
천륜을 어긴 더러운 여인, 불에 살라 죽어 마땅하거나,
돌에 맞아 죽임 당함이 너무나 당연한 창녀라고 비난하실 건가요…

하지만,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뇌성처럼 울려 퍼지는 주님의 음성은,
‘유다의 홀에서 왕이 나리라.’
내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주신 그분의 언약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나의 태 안에서 왕의 씨가 잉태되어
메시아 오실 그 길이 열려질 때, 날 비난하던 무리들은 노래할 것입니다.
‘그녀가 옳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