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문제의 치유에 대해 묻는 그대에게 - 스물일곱 번 째 만남
서울의 도심, 그것도 최첨단의 기업들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래비를 서있는 테헤란로, 일명 벤처 밸리(Venture Valley)에서 잰걸음으로 삼십 여분 비껴 앉은 이곳, L아파트로 이사한지도 어느덧 한 달 남짓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로 일지 모르는 삶의 여정 속에서, 주님이 가라시면 언제라도 가벼이 일어설 만큼 심플하게 살려고 노력해왔는데도, 하나 둘 늘어난 살림기구들과 포장 이삿짐센터 아저씨를 넉넉히 놀래킨 책 보따리들을 정리하느라, 하루하루 미루어왔던 답신을 위해 서둘러 펜을 들었지만, 어제는 하루 왼 종일 집안을 서성거리다가 밤을 지새우고 말았습니다.
사우나탕 못지않게 더운 거실의 중앙난방식 열기 탓으로 계절 감각을 잃은 남천죽의 균형 잃은 곁가지를 정리해주기도 하고, 두어 달 동안 보랏빛 작은 꽃을 피워, 보는 이들을 행복하게 했던 바이올렛의 빛바랜 꽃잎이랑, 작은 화분을 덮어버린 오동통한 잎사귀 몇 잎도 따내었습니다.
4차선대로 너머로 산소를 뿜어내는 작은 산 숲길의 신선한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쏟아지는 겨울 햇살과 함께 스며들 때, 소리 없이 피어난 춘란의 빗살무늬 연둣빛 작은 꽃에 얼굴을 부벼대고 향기를 맡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도 모자라 책꽂이에 꽂혀진 묵은 책들을 뽑아 갈피마다 꽂혀진 마른 꽃잎들을 털어 내기도 하면서 집안을 뱅뱅 돌았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렇게 늘 소소하게 딴전을 피우는 나의 못된 습성을 언제나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초저녁 잠 살풋 들어 깨어보니, 아니, 제가 잠든 사이 비밀스럽게 눈이 내린 것이었습니다. 겨우내내 펄펄 내리는 눈을 아쉬워하던 나의 그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얀 눈은 그렇게, 나 모르게 내려있었습니다.
그대 평안하신지요.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이키는 회개의 삶을 위해 이제는 우는소리 접어두고 자신의 가치 기준과 사상의 틀을, 그리고 철학과 유전으로 사유해온 비판적이고 냉철한 시각들을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우선 예수님의 심장을 닮고 싶다는, 그대의, 진지한 소망으로 시작되는 서신을 대하는 순간, 문득 내 자신을 돌이켜보았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긍휼함과 양선과 사랑을 품고 내 눈에 비추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요.
아니, 세상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싶습니다.
대도시 한복판, 낯선 곳으로 이사 와서 느끼는 사람에 대한 감정은 아직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머뭇거림이 내 안에 있음을 압니다.
'과연 강남'이라는 말대로 일상사가 편리하게 해결될 뿐 아니라 잡다함이나 촌스러움 없이 모든 이들이 젠틀하게 대하는듯 하지만 내면에 숨겨진 냉냉함과 경계심을 능히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는 이웃, 정갈하고 세련되어 있으나 때로는 깊은 수심을 안고 행여 말 붙일까 질겁이라도 한듯한 썰렁한 표정으로 구석에 붙어 서있는 여인네들의 뒷모습에서 왠지 모를 공허와 고독으로 쌓여진 견고한 성벽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난 사람들 속에서, 도시 속의 사람들 속에서 광야를 느끼고, 그 황폐한 땅에서 작은 꽃을 피우고픈 작은 정성으로 사람들에게 미소를 보내려 애를 씁니다.
속내로는 깊은 인생 얘기 나누며, 내 인생을 변화시킨 예수님 얘기도 향기로운 카푸치노 한 잔 마주 놓고 나누고픈 마음입니다.
궁리 끝에 난 기특한 계획 하나를 세워 놓았습니다.
다음 주 중엔 화사하게 피어난 호접란 한 줄기 씩을 토분에 담아 이웃집의 여리고성 같은 현관문을 열어보려고 합니다. 어때요, 기대되시나요?
문득 기억되는 어떤 책의 밑줄 그어진 한 켠을 적어보려 합니다.
"나는 대도시에서 이웃들과 악수를 나누면서도 우리들 사이에 황량한 땅이 가로놓여 있음을 느껴왔다. 우리는 우리의 목을 축여주던 샘을 잃은 채, 아니면 그 샘들이 말라버렸음을 알고 메마른 사막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린드버그 여사의 책으로 기억됩니다.
그렇군요. 메마른 마음. 메마른 가슴, 메마른 이 땅을 어떻게 윤기 나게 할 수 있을까요.
그대, 여호와께 돌이킨 자로서, 그 은혜의 깊은 샘물에 목을 축이고, 가슴 속 깊이 내려앉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깊은 상처와 고통의 기억까지도 샅샅이 끄집어내어 치유하고 싶으시다고 적어오셨군요.
글쎄요, 이 세상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겨진 문제와 상처 속에서 은밀한 갈등과 고민을 하며 살아가리라 생각됩니다. 만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위선된 자기 모습이 마치 제 모습의 모두인 양 착각하고 있거나, 포기하고 있을 것이지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나 고독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그대처럼, 내면에 꼭꼭 묻어둔 숨은 상처나 기억들을 인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등장합니다.(열왕기하 5:1-19) 그는 그의 왕 앞에서 존귀한 자이며 큰 용사였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말 못할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문둥병이었습니다. 부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병으로 그의 육신은 썩어가지만 그의 권력과 명예는 당분간 위장의 탈을 쓰고 가만히 있기를 강요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땅에서 노예로 붙잡혀온 어린 계집아이의 말을 듣고 선지자 엘리사를 만납니다. 그의 교만과 아집을 하나님의 사람 앞에 내려놓는 순간,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성경은 섬세하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인생이란 한편으로 결단과 선택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릎 꿇으리라 결단하는 순간, 그 올바른 선택으로 인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치유는 시작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원래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어떻게 변화된 존재인지를 인식하고 그 분의 사랑 안에서 확신에 찬 평안을 누릴 때임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치유,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는 분명한 믿음 속에 거할 때 시작된다고 거듭 말할 수 있겠지요.
성경에는 수많은 치유의 이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수가성 여인의 치유는 가슴이 찡해오는 여운을 남겨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작렬하는 태양열과 땅에서 솟아 나오는 열기로 섭씨 57도를 오르내리는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마을에 살고 있는 그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둔 창녀입니다. 마을 사람들 보기가 두려워 모두 다 낮잠을 즐기고 있을 그 시간에 그녀는 물을 길러, 아니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그 목마름의 해갈을 위해 죽기보다 싫지만 야곱의 우물을 향해갑니다.
그 때 그녀 앞에 선 유대 청년 예수, 그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선물합니다. 이 생수는 영원한 것이어서, 어디에서 예배드려야 할지, 오실 메시아를 어디서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몰라 하는 그녀의 영적 방황까지도 치유하고, 개인의 비천한 운명을 치유합니다.
그 동안 서로를 정죄하고 미워했던 이웃과의 관계도 치유됩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와 보라'고 외치며, 유대 청년 예수, 그가 참된 해방자로 사랑의 치유자로 오신 그리스도,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순간, 수치의 땅이었던 그녀의 땅이 감격의 땅으로 변모합니다.
깊이 숨겨진 상한 감정, 마음의 병, 정신병까지도 깨끗이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천하를 꾀는 자로서 인간을 사망과 저주의 늪으로 간교하게 유인한 사탄의 머리를 밟아버린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 예수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넉넉히 압니다.
그대, 밤이 깊었습니다.
창밖으로는 쉼 없는 자동차의 불빛이 명멸하며 최선을 다해 달려갑니다.
도시 속의 광야, 그곳에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작은 꽃 피울 그대 영혼을 사랑합니다.
이월의 첫날에
그대의 영혼을 사랑하는 이로부터
- k. y. 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