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이어질 편지

아브라함 - 눈물을 닦고 홀연히 일어서다

언제나 그 자리에 2008. 10. 27. 12:51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헤브론 저 너머 골짜기에서 올리브향기 담은 부드러운 바람결이 불어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사라의 베일을 가벼이 흔들며 지나갈 때 마다, 단단히 감겨진 그녀의 속눈썹 사이로,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말을 걸어 올 것처럼 미소가 흐릅니다.

아브라함은 가슴이 미어져 애통하며 울었습니다.
반드시 찾아 올 한 번의 죽음, 그 죽음 이후에 준비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지, 익히 알고 있다하여도,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를, 자신 앞에 펼쳐진 또 하나의 인생길 속에서, 사라 없이 홀로 가야한다는 사실이 목 메이기도 하지만......., 변화무쌍하여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신의 인생여정 가운데 불평 없이 따라와 준 그녀의 순종이 더욱 마음 아픈 기억들로 선명히 남아, 주마등처럼 가슴을 후비고 지나갑니다.



고향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미지의 땅을 찾아 길을 나설 때에도, 단 한 번도, 어디로 가느냐고, 어떻게 살 거냐고 묻지 않았던 그녀였습니다.
이방 땅, 서슬이 퍼런 왕들의 권력 앞에서 행여 죽임을 당할까 겁에 질려서, 자신을 누이라 속여 외간 남자의 침실에 밀어 넣어도 남편의 비굴함을 정면으로 지적한 적 없는 아내였습니다.


그가 전쟁터에 있을 때에도,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그녀는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온 터입니다.
분신처럼 믿고 사랑했던 여종 하갈이 주었던 배신감과 모멸감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칼날 같은 결단을 내려준 아내의 지혜로, 아들 이삭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밤하늘의 뭇별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되새기던 그 시간들...., 하나님과 함께 있어 아름다웠던 그 시간들이 그녀의 삶과 죽음을 찬란하게 승화시켰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느냐 하는 것 보다 얼마나 잘 살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세네카의 말이 아니더라도 삶의 길이보다 삶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야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팡질팡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코미디에 지나지 않고, 감성적인 사람들에게는 비극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궁극적인 승리의 과정’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영원한 날에 대한 소망과, 재림의 주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의 날까지 펼쳐질 하나님의 계획을 삶의 내용으로 담고 있는 우리는, 인생의 황혼 길에서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힘 있게 눈물을 닦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울고 있던 아브라함이 사라의 시체를 그냥 놓아 둔 채, 벌떡 일어나 헷 족속에게 나아갔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실 그 땅을 공식적으로 소유하여, 그의 약속된 후손들에게 계승해 주기위해, 홀연히 일어 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속에서 별빛이 내는 단 한 번의 반짝임에 불과합니다. 섬광처럼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목표에 이끌려 가는 아브라함의 노년이야말로, 어떤 젊은 이에 비할 바 없는 에너지가 넘쳐흘렀을 뿐 뿐 아니라, 그의 남은 황혼 길에는, 하나님과 통하고 아비와 가슴이 통하는 언약의 후계자 이삭이 있었고, 이방인인 그에게 밭과 묘실을 거저 주고 싶어 할 만큼, 그를 칭송하며 존경하는 이웃이 있었기에, 사라 없이 가는 그 길이 결코 외롭지 않았을 터입니다.


슬픔을 딛고 일어선 그가, 은 400세겔을 주고 산 막벨라 굴은, 사랑하는 아내는 물론 자신과 그의 아들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이스라엘 열조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음은 물론, 이스라엘 민족에게 남겨준 법적인 유산인 동시에 신앙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증인들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그들의 삶에 못지않게 오늘날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죽음은, 인간은 나서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창세기 3:19)


이름 그대로 허무하게 살다간 아벨의 죽음은,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오직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며(출애굽기 12:13) 희생제물을 드리는 피의 예배임을(출애굽기 3:18) 이미 알고 있다 할지라도, 문 앞에 엎드려 호시탐탐 공격 대상과 멸망시킬 대상을 찾고 있는 죄와 어둠의 세력에게 장악된 가인의 영적 상태를 간과하여(창세기 4:7 Sin is waiting to attack and destroy you??- NLT) 영적 싸움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권세를 누리지 못한 데서 비롯된 허망한 죽음이었음을 교훈으로 남겨줍니다.


비스가 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120세에 생을 마감한 모세의 죽음은, 사명이 끝나는 그 날까지 반드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시간표를 확인 시키는 가운데 복음의 종교화와 개인의 우상화를 미연에 방지한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직접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은 가장 선명하게 죽음에 대한 준비를 확고하게 합니다.
날마다 자색 옷과 결이 고운 옷으로 치장하고 파티를 즐기며 호화로이 살았던 부자, 그는 마음 또한 넉넉하여 개들이 그 헌 데를 핥을 정도로 지저분한 거지 나사로가 문 앞에 죽치고 앉아 평생을 얻어먹어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건만 너무나 고통스러운 지옥에 떨어져 혀끝을 서늘하게 할 물 한 방울을 갈구합니다.


반면에 평생을 가난과 질병의 저주 속에 살았던 나사로는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이 죽음을 놓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 올려서 육신적 관점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좀 곤란합니다.
이 부자는 적어도 나사로의 가난을 외면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절대주권도 모르고, 아브라함이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그 언약의 비밀도 모르는 부자가, 가난한 이에게 부스러기라도 던져 줄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임재를 무시한 채, 순전히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착각하여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오늘날의 부자들을 참고하면 이해가 될 만합니다.
어찌됐던 부자는 선행도 하고, 나름 구제도 했지만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행위나 인격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로 죽어서 천국은 갔지만 이 땅에서는 천국을 빼앗긴 채 고난과 고민 속에 살았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반드시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권세를 누림으로 하늘 배경을 가지고 가난과 질병에 도전하여 싸워 이길 영적인 힘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의 자존심을 사그리 구기면서 살았으니, 이 땅의 재물보화를 다 가지고도 고독하고 갈증 나는 부자에게 전도 한 번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더욱이 전도의 미련한 것 속에 구원의 기쁨을 감추어 놓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 리가 만무하지요....(고린도전서 1:21)

스테반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자의 찬란한 영광을 볼 수 있듯이, 한 생애를 하나님과 그리고 남편 앞에서 아름다운 순종으로 살다간 사라의 죽음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준비할 죽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죽음은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영생을 향한 시작일 수도 있고 영원한 형벌을 향한 출발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 영원 축복의 시작임을 확신 했던 아브라함...,

그래서 그는 사라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닦고 홀연히 일어 설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