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이어질 편지

약속의 아들, 이삭 - 마침내, 거부(A wealthy man)가 되다

언제나 그 자리에 2008. 12. 26. 07:08

 

 

 

 

 

약속의 아들, 이삭 - 마침내, 거부(A wealthy man)가 되다

(성경을 통해 보는 복음, 스물 여섯번째)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음으로 태어난 약속의 아들, 언약 안에서 법적인 상속자로 태어난 이삭의 생애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인생여정을 거울에 비춰 보듯이 꼭 빼닮아 있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오직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든 고향을 등진 채,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났던 아버지의 믿음을 배워, 그는 메시아가 오실 땅, 가나안을 떠나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준행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함으로, 아름다운 아내 리브가를 맞이한 그의 생애가 자못 평탄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혼인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출생비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오직 하나님께 간구하여 언약을 계승할 자신의 후계자를 응답으로 받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5:21)

그런 그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먹고 사는 현실 문제 앞에서 잠시 흔들리는 것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피할 수 없는 시험으로 다가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고 만 것입니다. 기근을 피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 우상의 땅 애굽으로 내려갔듯이, 그 또한 지극히 현실적이고 육신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약속의 땅을 떠나 그랄 땅,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통치하는 곳으로 내려갑니다.
가나안 남쪽 경계선,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지중해 연안을 끼고 비옥한 땅이 광활하게 펼쳐진 그 곳에는 곡물이 넘쳐 났습니다.

 

 

 

 
급한 불을 끄고 배고픈 문제는 당장 해결 된 듯 보였지만 이삭에게는 그만 더 큰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아리따운 아내 리브가를 노리는 블레셋의 음흉한 사람들과 그랄 왕 아비멜렉이었습니다.

 
아차! 싶었던 이삭은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을 염려하여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아내를 누이라 속입니다.

아내 사라를 두 번이나 팔았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인본주의가 그대로 아들에게 투영되는 순간입니다.

뿌리 깊이 내려오는 가문의 불신앙적 체질과 기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십사 시간 깨어 있지 않으면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어 우리의 삶을 덮쳐버립니다.

 
이방 땅으로 내려와 그는 하나님 앞에서 드려야 할 예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피의 예배, 그가 어린 나이 열두 살에 깨달았던 예배의 축복,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번제로 올려야 하는 언약의 예배, 다시 말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닥쳐올 재앙과 위기를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완전하게 해결하셨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예배를 놓치는 순간, 이삭의 삶에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삭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예배의 축복과 하나님의 약속을 놓쳐버리는 순간, 우리는..., 기도하기보다는 육신적인 충동과 열심에 따라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이며,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빈 시간에도 하나님의 자녀, 약속의 자녀로서의 신분과 권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8)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축복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게 됩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성령께서 그 생애를 아름답고 복되게 인도하시고, 어떤 문제와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힘입어,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면 반드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고 맙니다.

 
그것은 바로, 이 구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도적질하고 훔치고 멸망시키며 혼미케 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0:10, 고린도후서 4:4, 마태복음 12:28, 고린도후서 11:14)

 
창세기 3장에 출현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시키고, 아담과 하와의 평화로운 가정을 깨버렸던 그 사탄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에도, 오늘 날 우리의 시대에도 그대로 재현되어 활동합니다.

 
사백 삼십 년 동안 바로왕의 폭정 아래 노예 살이 해야 했던 고단한 인생길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는 길, 장자가 이유 없이 죽어 나가는 재앙의 현장에서 안전하게 빠져 나오는 길, 그것은 오직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희생 제물을 드리는 피의 예배,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십자가의 도’가 아니고는 그 어떤 훌륭한 인간적인 방법 - 논리적이고 철학적이며 지극히 종교적인 방법으로도 절대 불가능합니다.( 출애굽기 3:18, 12:13)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 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 전서 1:18)

 
그런데 신실하신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가 실패하고 실수했다 해서 그냥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실패를 막기 위해 화급히 이삭 앞에 나타나셔서 그가 받을 미래의 축복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 주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리라, 이 모든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리니,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의 땅에서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모든 땅을 주어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창세기 26:2~5 표준 새 번역 참조)

 
이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일 년 농사를 지으면 백 년 동안 지은 만큼 수확을 거두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가는 곳마다 샘물이 넘치는 풍성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의 축복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이 시기할 만큼,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들마저도 깜짝 놀랄 만큼, 그가 응답을 누리는 축복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축복을 바라보고 시기한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우물을 메우고 빼앗고 쫓아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 되어 아예 샘의 근원을 발견합니다.
빼앗으면 주고, 시기하면 양보하기를 거듭하며 장막을 옮겨 가던 그가 마침내 다다른 곳, 그 곳이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이삭이 그 곳에 장막을 치고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드리니 그의 종들이 다시 우물을 팝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향기로운 에셀 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바로 그 땅에 다다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기한 사람들이 이삭을 밀쳐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밀한 물 밑 계획 속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언약의 끈을 놓치고 잠시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이삭의 생애는, 하나님의 약속과 예배를 회복하는 순간, 백 년의 응답을 앞당기는 최고의 축복과 샘의 근원을 얻는 응답을 누림으로써 그는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God blessed him. The man got richer and richer by the day until he was very wealthy. -Genesis. 12:13- The Mess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