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회개의 의미를 묻는 그대에게 - 스물여섯 번째 편지
성탄과 연말을 분주하지만 진지하게 보내고 저는 이곳 동해에 와 있습니다.
겨울 삭풍에 푸르른 바다가 하이얀 포말을 뿜어내며 포효하고 있는 가운데, 깎아 내린 빙산의 일각처럼 투명하게 솟아오르는 물기둥 사이로 유난히 많은 갈매기 떼들이 무리 지어 날고 있는 걸 바라보노라니까 공중을 날아야만 자유한 새들의 창조원리가 더욱 실감되었습니다.
그대, 늦었지만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핑크빛 구슬로 수 놓여진 성탄카드 겸 신년카드에 쓰여진 그대의 서신을 대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살며시 내려앉아 이제 깊숙이 뿌리 내려가는 그대의 가슴을 충분히 읽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에 있어,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이 내 안에 있게 된 그 날 이후부터는, 들에 핀 야생화 한 송이만한 가치만큼도 내게 의미를 두려하지 않았던 타인들에게까지도, 자꾸만 내 사랑을 나누어주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 그분, 예수님과 나누는 나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오래 하는 사랑에 길들여지지 못한 우리네들에겐 생수와 같이 갈증난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입니다.
잠시 비켜 가는 이야기지만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첫 눈에 반한 그 순간부터 그들의 사랑은 길어야 3년, 짧으면 18개월이라 하더군요.
오래오래 지속되는 사랑은 그만두고라도, 잠깐의 사랑 속에서도 우리를 갈등케 하는 것은 그것이 아마도 영혼으로 나누는 사랑 -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적인 사랑을 닮지 못한 채, 단순히 감각의 틀 안에서 육신의 희열에 열중하는 에로스적 사랑에 머무르기 때문이 아닌지 싶습니다.
새해에는 그동안 무심했던 모든 이들을 더욱 사랑하며, 용서하지 못해 몸부림쳤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다 떨쳐버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싶다고 적고 계시는군요.
그러나 가끔 가끔 사로잡히는 원망과 불평, 이유 있는 과거의 미움들이 자신의 생각 속에 파고들 때마다 너무 괴로워 주님 앞에서 시원스레 토로하고 싶으시다구요.
그렇게 해서 새롭게 새날을 시작하고 싶다고 덧붙이면서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토로하는 것이 회개하는 것이라면 그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오셨군요.
그대에게서 '회개'라는 단어를 전해들은 순간,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 나의 신앙생활의 영상이 잠시 스쳐지나갔습니다.
하얀 미사포를 쓰고 어두컴컴한 고해소 앞에 무릎을 꿇으면, 분명 발목까지 닿는 검은 수단을 입으셨을 신부님의 목소리가 조용하고 엄숙하게 들립니다.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죄를 고백하라는 신부님의 준엄한 명령에 따라 난 오직 '내 탓'임을 자백하며 미주알고주알 일상에서 벌어진 그다지 즐겁지 않은 기억들을 추억해내어 고백했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회개였고 신부님이 내리신 몇 가지 착한 행동을 대신 함으로써 나의 죄는 보속(補贖)되었다고 생각했었지요.
그 후, 나의 죄를 도말하실 중보자는 신부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믿음으로만 의에 이르러 구원에 이른다는 확신 아래, 제 개인의 종교개혁을 감행하여 성당이 아닌 교회에 다니게 된 그때부터의 회개는 더욱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특별히 죽이고 훔치고, 탐낸 적이 없이, 십계명이나 법 없이도 살 만하다고 내 스스로를 평가한 나로서는 주로 내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은밀한 죄성(罪性)이 문제였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있다고 하면 난 밥 먹듯 금식하며 내 육신을 괴롭혀서까지 예수님 앞에서 회개를 감행했습니다.
그래서 특히 나를 기죽이는 것은 바울이 내린 '사랑의 정의' 이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겉보기에는 부드럽고 진지하며 희생적인 것 같고 겸손한 듯 보였지만 제 내면에 깊숙이 감추어진 죄의 속성, 그것은 주님과 나만이 아는 나의 위선이며 가면이었습니다.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인 양, 그런 내 자신 때문에 난 끝없이 괴로워했고, 눈물을 쏟으며, 용서하시라고, 이 연약한 자를 용서하시라고 몸부림 쳤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주님 앞에서 해야 될 마땅한 회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진정으로 회개해야 할 '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었던 이후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죄'란 하나님 떠난 것, 즉 하나님과 함께 있지 못하고 분리되어있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로마서 3:23)
나를 모태에서 조성되기도 전에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이미 구별하여 부르시고(에레미야서 1:4) 함께 있고 싶어 하시는 그분의 사랑 (마가복음 3:13-15)을 알지 못하여 그분을 떠나있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고, 그분으로부터 떠나있는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 나의 삶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진정한 회개임을 은혜로 깨달은 순간부터 나의 삶은 새털처럼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란 헬라어로 '메타노에이테' 그 원어적 의미는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빈들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셨으니 그분께로 돌이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껏 우리 안에 이해된 회개에 대한 인식은 그저 윤리적이며 율법적, 도덕적 잣대에 따라 과거지향적인 기준에 잡혀있었습니다.
율법적 기준에서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면, 오른 눈이 실족케 할 경우 빼내어 내버리고, 오른 손이 실족케 하면 찢어 내버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5:27-30)
그러나 진정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없으므로(로마서 3:10)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 가운데서만 올바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력히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율법을 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마태복음 5:17), 그분의 권세와 사랑을 힘입지 않고는 이 땅에 의인은 없으니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회개란, 자신의 정체성, 즉 예수 그리스도 그 귀한 십자가의 보혈을 힘입어서 구원에 이르지 않고는 도저히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 된 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분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획 속에 있는 것이며 그분과 방향 맞춘 꿈을 갖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사망과 죄와 저주 가운데 빠져있는 온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구원의 소식으로 오실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 그분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것이라는 그 은혜의 약속은 신약에서 십자가의 도(道)로 연결됩니다.
멸망 받는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능력으로 나타날 십자가의 원리(고린도전서 1:18)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합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했다면 그것이 죄이며, 그로부터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B. C. 1400년 경 여리고 성에 살았던 이방 여인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살려준 그녀에게 내려진 선물은 바로 '붉은 줄'을 벽에 드리움으로써 받은 생명의 구원이었습니다.
그 붉은 줄이야말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낸 유월절 어린양의 피 이며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도덕적으로 정결치 못한 비천한 신분의 그녀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도록 상승시킨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다말은 유다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다윗의 10대조가 되는 베레스를 낳습니다.
윤리적인 잣대로는 도저히 측량키 어려운 죄인이지만, 유다 가문을 통해 반드시 이 땅에 오실 메시아의 언약이 계승되어야함을 알았던 그녀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그 계획가운데 거한 용감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행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처음부터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대로...."(사도행전 26:4)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의 가장 엄한 파(派)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한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토해낸 고백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눈을 뜨니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기업을 얻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사도행전 26:18)
그렇습니다.
율법으로 완벽한 바울, 그였지만 영적인 눈이 뜨였을 때 비로소, 자신이 사단의 권세아래 놓여있는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이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도록 우리를 속여 에덴의 축복을 상실케 한 그 사단, 그 영적 존재에 대한 눈 뜨임 없이는 결국 완전한 회개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지식인 니고데모,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던 그 경건한 유대인에게 주님은 말합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못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없이,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권세,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 그것을 바로, 그대와 나,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얼어붙을 듯 청명한 겨울 밤 하늘엔 수정처럼 맑은 달과 별이 빛을 냅니다.
어느덧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파도소리에 묻혀 들려오는군요.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나아온 바울과 같이,
그대와 나 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한 해이기를 소원합니다.
새해에, 답신을 기다리며
그대의 영혼을 사랑하는 이로부터
- k. y. 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