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이어질 편지

창밖의 남자, 아브라함 - 그러나, 그는 선지자

언제나 그 자리에 2008. 5. 24. 02:54

하나님의 관심은 언약 붙잡은 하나님 자녀에 방향 맞춰져

 

 



그랄 땅의 밤이 깊어질수록, 아비멜렉의 궁전 저 편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더욱 스산하기만 한 데, 날아갈 듯 여울진 베일 뒤로 묵묵히 얼굴을 숙인 아내, 사라의 라드 향기가 아직도 생생히 남아, 가슴을 후비듯 아브라함의 마음을 목메게 합니다.

왕과 아내가 있는 침실 창밖으로는 사그러져가는 불빛이 점점 어둠 속으로 잦아들어가고…, 회한과 질투와 불안의 화신이 되어 아브라함은 바람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이 신파극 같은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겁 많은 체질이 쉽사리 바뀌지 않은 탓에, 나이 들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를 연모하는 왕들로 인해 행여 목숨이 날아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자신의 이복동생이라고 속이는 구차한 거짓말을 그랄 왕에게 한 뒤, 침실로 이끌려 간 아내 생각에 잠 못 이루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속수무책으로 집에 돌아온 아브라함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을 그 때에도, 좋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에서 확실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되레 그를 엄하게 꾸짖으실 뿐 아니라, 왕으로 하여금 깊은 잠에 빠지게 하여 사라의 몸에 손도 못 대도록 방어벽(?)을 치셨습니다.

“너는 남편이 있는 여자를 데려 왔으니 죽어 마땅하도다.”
(“You are as good as dead - that woman that you took, she’s a married woman.”  - 창세기 20:3 - The Massage)
 
 
잠자리는커녕, 아직 사라에게 손도 대지 못한 데다, 이복동생이라는 거짓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아비멜렉은 억울하기 짝이 없어서 항의합니다.

“아니,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Would you kill an innocent man? -창세기 20:5 - The Message)


이때, 의롭다함은, 하나님의 법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의(righteousness)’가 아닌, 단순히 ‘결백함( innocent)’을 지닌 ‘이방인’을 의미하는 말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나는 네가 깨끗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잘 안다. 그래서 너를 막아 너로 범죄 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그 여인에게 손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여인을 이제 남편에게 돌려 보내거라, 그는 선지자이므로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창세기 20:6-7)

아비멜렉 입장에서 보면 참 황당하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질문은 동일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 사람은 저렇게 깨끗하고 결백한 데 웬 지옥?
하나님 믿는다고 하는 저 사람, 거짓말쟁이 아냐?
그런데도 구원 받았다는 거 맞아?”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법은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약속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거의 편애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전통과 규례, 율법에서 비롯된 도덕적 기준과 판단 논리는 하나님의 그것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하여 ‘그는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일컬어 ‘하나님의 입’을 대변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명백히 밝혀주신 것입니다.

이 선지자라는 직분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영광 본체를 버리고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로 이 땅에 오시어 하나님 떠난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의 길을 여실만큼 중요한 직책입니다.(요한복음 14:6)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선지자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를 극한 상황과 한계 상황에서 구해내실 뿐 아니라, 그의 중보기도 없이는 그 누구도 멸망과 실패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그의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라.”(창세기 20:17-18)

하나님의 자녀라 하여도 우리는, 아내를 자신의 유익과 동기에 따라 두 번이나 팔아넘긴 아브라함처럼 때때로 연약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인본주의적 판단에 의하여 애굽으로 내려가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팔아넘기는 실수를 합니다.(창세기 12:1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바로를 통하여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소유하게 합니다.(창세기12:16)

그렇게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도 육신의 법을 다스리지 못한 아브라함은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요, 언약의 씨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신실하게 지켜집니다.

사라의 태에서 반드시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기에 하나님은 사라를 보호하셨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로 세우겠다는 약속에 따라, 그의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 실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가진 도덕적 신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있습니다.
 
그 언약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 - 여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창세기 3장에서 비롯된,
 
하나님을 떠난 문제, 마귀의 통제 아래,
 
죄에 묶여 살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창세기 3:15)


이 언약 안에 있으면 실수는 할 수 있어도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보통 일 년에 1460번, 그리고 한 평생을 사는 동안 88000번 정도의 거짓말을 선의든 악의든 한다고 합니다.
좀 심하다 싶지만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타당성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가장 위험한 거짓말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짓말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욕심, 정욕과 야망에 따라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거짓말쟁이 마귀의 체질(요한복음 8:44)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땅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심지어 사도 바울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언약 안에서 전도와 선교에 생명을 불사른 사도 바울의 진실한 고백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권세를 당당히 누리며 은혜 가운데 감사함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7:23- 8:2)


더욱이 그는 우리의 갈등이 혈과 육에서 오는 것이 아닌, 하늘의 악한 영들과의 싸움인 것을 알고 치열한 영적 전투 속에서 살았습니다.(에베소서 6:10-17)
 
- k. y. 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