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이어질 편지

천재로 불리던 그들의 삶, 그리고 죽음

언제나 그 자리에 2004. 3. 9. 14:53

눈에 보이는 것을 現實이라 하고,

감추어져 있는 본래의 모습을 事實이라 합니다.

그대가 아직 못 보았다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천재로 불리던 그들의 삶, 그리고 죽음

 

인류 역사 속에는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천재적 기질을 발휘했던 인물이나 영웅적 삶을 살다간 인물들이 많다.
그들이 남겨둔 그런 삶의 자취들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들은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면에서는 너무나 위대하고 훌륭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의 뒤안길을 살펴보면 일반 사람들보다 더 엄청난 영적문제나 정신적인 고통 속에 살아간 이들도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그런 고난이 더욱 아름다운 작품을, 혹은 영웅적인 삶을 살게 했다고 변호하지만 복음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 없이 성공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저주요 재앙임을 쉽게 진단해 볼 수 있다.

특히 음악의 천재들 중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과 고난 속에 살았던 이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천재 음악가들의 말년과 죽음의 시간들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너무나 위대한 인물들이었기에 그들의 불행했던 부분들을 짚어본다는 자체에 송구한 마음도 들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삶을 살펴보면서 음악의 천재인 사단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 가를 살펴 오늘을 사는 음악인들과 성도들에게 좋은 지표로 삼고자 한다.
 


많은 천재 음악가들은 일반 사람들의 수명에 절반도 못되는 일생을 산 이들이 의외로 많다.
또 환상이나 환청에 시달리거나 정신적 질환으로 고통하다가 죽은 이들도 허다하다.
뿐 아니라 그것이 집안의 내력이 되어 가문 속에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저주로 고통당한 자들도 여럿 있었다.
 
많은 기독인들은 천재 음악인들이 거의 대부분 찬양곡들을 많이 썼기에 그들도 하나님을 믿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의뢰받아 썼으며, 곧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썼을 뿐이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기독교와는 무관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몇몇 천재음악가들 중에 실로 대단한 신앙심으로 살다간 이들도 더러 있다.
하이든이나, 바하, 헨델 같은 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 모두가 음악가들 중에 가장 건강하게 장수 했다는 사실이다.


음악의 신동이며 천재라고 일컫는 모차르트는 35세에 죽었고,
악성이라 불리는 슈베르트는 단지 31살 밖에 살지 못했다.
페르골레지는 26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헨리 퍼셀은 36세,
벨리니는 34세,
베버는 40세,
멘델스죤은 38세,
쇼팽은 39세에 죽었다.
 
반대로 바하는 65세까지,
헨델은 74세,
하이든은 77세 까지 살았다.
세 악성은 모두 환갑을 넘긴 수(壽)를 누렸고
베르디는 거의 90세 까지 사는 복을 누렸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배웠으나 스승보다 더 일찍 죽었고
모차르트는 베토벤보다 14년 연상이지만 베토벤이 21세 때 죽었으며
베토벤은 그후 36년을 더 살았다.
바그너가 출생했을 때 슈베르트는 불과 16세 였지만 바그너가 15살 때 죽었다.
 
이처럼 음악가들의 출생과 죽음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한 면들이 많아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모차르트(1756-1791, 35세) - 프리메이슨 단원, 신경쇠약, 가난, 환상, 환청 속에서 생을 마감.
 

아버지가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으며 7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두 명만 살아남았다. 그중에 하나가 모차르트다.
아버지는 궁정 음악가였기에 모차르트는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게 되었으며 한번 들은 곡은 그대로 연주할 만큼의 암기력과 모방의 천재적 기질을 타고났다.
 
1782년에 콘스탄체와 결혼을 했으나 그녀는 변덕스러운 성격인 데에다 자신만 아는 악처로 시아버지와의 관계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또 아내의 규모 없는 살림살이로 모차르트는 평생 빚쟁이에 몰리면서 살았으나 그녀는 별장이나 온천장에서 요양이나 하는 호화로운 생활로 지냈다.
궁색해진 모차르트는 메이슨 단체에 손을 벌려 여러 번 재정적 후원을 받았으나 그것으로 가난의 굴레를 벗을 수는 없었다.
모차르트는 어릴 적부터 류마티즘 열로 심장이 좋지 않았다.
이것이 가난과 겹치고 아내와의 불화로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의 후기 작품이면서도 가장 유명한 오페라인 ‘마술피리’는 프리메이슨적 신앙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초기 인생은 천재라는 별명으로 모든 사람의 관심과 주의를 모았으나 정작 작품의 완숙도를 더한 후반기에는 주위의 관심이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 그의 성격상 귀족들과 잘 어울리거나 또 그들에게 예속되는 일을 싫어했기에 결국 그들로부터 냉대와 소외를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그가 경제적 어려움과 더 깊은 파멸의 길로 빠지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당시는 터키와의 전쟁 중이라 귀족들조차 살기 힘들어 이런 천재적 음악가를 감싸주고 보듬어줄 환경이 되지 못했다.

이런 현실이 모차르트로 하여금 저급한 삶을 살게 만들었으니 곧 여성 편력증이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모차르트의 여자는 한 군단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 불안감과 공포, 악령에 시달리는 고통을 이기기 온갖 타락의 길을 헤매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깊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는 그로 하여금 극도의 불면증과 환상 환청에 시달리게 했다.
마지막 죽음의 병명은 심장충격 과다출혈로 알려지고 있다.
 


슈만(1810-1856, 46세) - 환상 환청의 증세로 정신 병원에 입원 중 죽음.
 

슈만을 가리켜 흔히 낭만파 음악의 대가라고 평가한다.
아버지는 서점을 운영하는 출판업자로 슈만의 어릴 때 정신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간곡한 소원을 따라 법률을 전공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음악을 하게 된다.
교양 있고 유복한 집에서 자란 슈만은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아이로 자랐으나 15세 때 부친과 누이를 사별하고 이어서 형과 형수가 죽음으로 점차 과묵하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형수의 죽음은 그로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했고 자살까지 감행할 정도의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이르게 했다.

특히 피아노 선생의 9살 된 딸 클라라를 좋아하면서부터 이성에 눈을 뜨게 되고 이것이 그의 일생을 크게 흔들어 놓은 중요한 사건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손가락을 다쳐 피아니스트가 되는 꿈은 접고 작곡자가 되기를 결심한다.
클라라가 16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그녀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장인 될 분의 심한 반대 때문에 크게 절망하면서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술과 여자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알콜 중독 단계까지 가버렸다.


그가 18세가 되는 해부터 환상과 환청이 그를 사로잡기 시작하였고 1830년 대에 벌써 자살을 세 번 이상 시도하였다.
그의 일기에도 "나는 이제 완전히 정신을 잃은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고
1837년에의 일기에는 "암흑의 악마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썼다.
클라라와는 1840년에 결국 결혼은 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인생이었다.
청신경이 나빠 작곡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성격이 너무나 괴팍하여 사람들과의 마찰이 심했다.
그래서 음악 활동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급기야는 환상, 환청증세와 불면증, 극심한 우울증 등으로 시달렸다.


결국 1854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를 자청하였고 다음날 물에 뛰어들어 자살까지 시도했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1854년-1856년까지 정신병원에 있었는데 증세가 워낙 심각하여 면회까지 금지시켰다고 한다.
결국 1856년 7월 29일 정신 병동에서 그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7자녀를 두었는데 아들 세명중 한명은 폐결핵으로 24살에,
또 하나는 몰핀 중독자로 42세에 죽었고,
다른 하나는 정신 분열증으로 25년간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51세에 죽었다,
딸들 4명중 하나는 폐결핵으로 32살에 죽고 다른 두 딸들은 독신으로 살았다.
 

슈베르트(1797-1828, 31세) - 극한 가난, 매독으로 죽음
 

농부인 아버지와 직공인 어머니에게서 탄생한 그는 평생토록 가난과 질병에 매인 생을 살다가 간 불행한 음악인이다.
키가 작아 군에도 면제된 그는 25살 때 친구들 사이에서 난봉꾼이며 엽색행각으로 이름난 친구 쇼바를 알게 되면서 일생을 망치는 불행의 수렁으로 깊이 빠지게 되었다.
곧 그와 어울려 쾌락과 방탕을 일삼다가 젊은 나이에 매독이라는 저주스런 질병에 걸린 것이다.
이것이 천재 음악가로 하여금 요절하게 만든 단초가 된 것이다.


평생 질병과 가난과의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남들도 다하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된다.
병원에 입원하면 그 때마다 친구들에게 처량할 만큼의 자신을 한탄하는 글을 써 보내기도 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불운하고 가여운 사람이라"고...
사실 그는 음악적으로 대가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명성은 전혀 얻지를 못했다.

그의 노래들은 문자 그대로 주옥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거의 무명의 존재로 묻혀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더더욱 가난한 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어떤 땐 한끼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식당 주인에게 노래 한곡을 즉석에서 작곡해 주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생전에는 그의 작품들이 출판되거나 공연되지도 못했고 사후에야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인정받지 못했기에 직장도 얻지를 못했고 그래서 1828년 자신의 작품으로 유일하게 연주회를 가졌고 그 때 비로소 자신 소유의 피아노를 사게 되었다.
 
바로 그가 죽은 해이다.
그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성격으로 과묵한 생을 살다가,
결국 1828년 10월에 매독과 장티프스로 인한 질병으로 31세의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