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그대에게
그 다섯번째 편지...
노오란 산수유 꽃망울이 봄소식을 실어 나르더니 바람결에 흔들리는 수양버들의 가지 끝에서부터 연두빛 물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담장마다 백목련이 귀부인 마냥 품위있는 미소를 보내고 민들레며 제비꽃 새싹들이 꽃잎을 만들어내느라 부산하게 물을 길어 올리는 새봄입니다.
우리처럼 감성으로 사는 세대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아니 생소하기보다 위협마저 가해오는 디지털 시대, 이제는 펜을 들어 편지 쓸 필요도 없이 문자 메시지로,
즉흥적인 생각을 보내고 단순화된 그림으로 문장을 대신하는 이 시대에 위기감을 느낀다는 그대의 서신에서 깊은 동질감을 느낍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글쓰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기계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어쨌든 밤새워 하얀 백지 위에 편지를 쓰고, 쓰고는 다시 구겨 버리기를 몇 차례 거듭하다가 겨우 완성된 편지마저도 날 밝은 아침에는 감정의 끝자리까지 들킨 것 같아,
우체통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랍에서 잠재우기를 반복하던 지난 시절들을 떠올리면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 고향 같은 편안함을 주거니와 답신을 기다리는 시간들 속에서 소망과 기대를 키워간다는 그대의 서신을 받아보니 저 또한 너무나 기뻤습니다.
더욱 저를 기쁘게 한 것은,
겨우내 방치해두었던 창틀의 굳어진 화분 흙 속에서 뾰족이 고개 내어민 여린 새싹을 발견하는 순간,
마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빛으로 나아온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하루 내내 희열 속에 살았다는 그대의 고백이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되었던 것으로부터의 질긴 생명력을 보았을 때의 외경심은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대의 허망했던 인생 길을 돌이켜,
꼭 거쳤어야 할 운명이라는 기나긴 여정으로부터 완전 해방되는 길,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가슴으로 영혼으로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처럼,
청년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확실히 인생 길을 바꿔버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고 싶으시다구요.
그 만나는 길이 무엇이냐고 물어오신 그대의 진지함 속에서 이미 그대가 모태에서 조성되기도 전에,
태에서 나오기도 전부터 그대의 영혼을 사랑하시고 구별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예레미아 1장 4절).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Holy Spirit)이시기 때문에 성령과 진리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4장 24절).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지만 진정한 남편이 없는 사마리아의 이방 여인,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는 있지만 공허와 혼돈 속에서 어두운 인생을 살아가던 그녀,
이웃들의 비웃는 눈빛이 두려워 동네 모든 이들이 더위를 피해 낮잠을 즐기던,
섭씨 오십 삼도의 사막의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와야만 했던 그녀 앞에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네 죄를 회개하라거나, 바른 행실로 살아가라고 훈계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려니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피폐한 인생에서 오는 갈증은 영원한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만 해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해 전 조그만 잡지에서 읽었던 한 중국인의 간증이 기억나서 적어봅니다.
"나는 인생 여정을 걷다가 죄의 큰 수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마호메트가 내게 와서 말했습니다.
'너는 실제로 그 수렁에 있는 것이 아니야, 다만 네가 빠졌다고 생각할 뿐이지.'
다음으로 부처가 와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네가 그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일곱 단계가 있다. 만약 네가 기어오르려고 노력하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애써보았지만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와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네가 수렁에서 나올 수 있는 10단계의 자기 수양이 있다. 그 중에서 네가 절반만 행할 수 있다면 나머지 반은 내가 행해서 너를 끄집어 올려주겠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여전히 나는 죄의 구덩이 안에 있었고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예수라는 사람이 다가 왔습니다.
그는 내 형편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런 충고도 없이 그는 왕의 옷을 벗어 던지고는 한 처녀의 몸을 통하여 이 땅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결코 죄를 지은 일이 없으신 그분은 나를 위해 죄인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구덩이 속으로,
오물과 진흙 투성이 속으로,
죄 가운데로 내려오셔서 나를 들어올리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해주셨으니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종교나 지고한 철학으로도, 그 어떤 착한 행실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으므로 죄 없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지요.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이 땅에 의인은 없으되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로마서 3장 23절).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영혼은, 자비로운 석가모니라 할지라도, 윤리와 도덕, 철학의 고귀한 경지에 이른 공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만나는 것이 무에 그리도 중요한 일일까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땅의 모든 문제,
두려움과 저주,
사망의 문제,
정신적인 고통,
육신의 질병,
삶의 불균형에서 오는 인간의 근본문제,
즉 운명이라 불리우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데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떠나서 생긴 문제는 하나님 만날 때만이 해결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단순한 해답이 아닐까요.
그 만나는 길,
예수 그리스도,
이 분에 대하여 자세히 써놓은 증인문서가 바로 구약성경 39권과 신약성경 27권으로 묶여진 성경 66권입니다.
그러므로 꿀벌이 꽃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꿀을 빨 듯이 그대의 영혼의 심지를 말씀 속에 깊이 깊이 내리워 보십시오.
그리하면 말씀 속에서 인생의 해답과 길을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대의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되고 새살이 돋는 삶의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할 수 있음을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4장 12절).
저는 어느 날인가 창세기 1장 1절의 대 선언에서 숨막히는 긴박감과 우뢰와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난 서신에서도 밝혔듯이 이 땅의 무신론과 잡다한 다신론을 한 마디로 거부하는 진리,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연이어, 그 창조 이전의 이 땅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에 있었다고 성경은 밝히면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운행하셨다'고 하는 이 표현은 단순히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가 소중히 알을 품고 굴리듯이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사랑으로써 부단히 창조하신다는 뜻의 히브리어 '메라헤페트'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God said),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시자 빛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그 빛은 단순히 햇빛이나 별빛이 아닌 태초의 빛이었고 창조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이 땅에 임하자 혼돈은 질서로 정돈되었고 공허한 땅은 온갖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졌으며 빛이 오자 어둠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려 잎을 내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습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새는 높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원리요, 하나님의 창조원리였습니다.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을 지으신 광활한 우주 위에 태양과 달과 지구와 별들을 만드시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고 아름답게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스려 지키게 하시려고 비로소 인간을 창조하시되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창1장 27절, 28절).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려야 열매를 맺듯,
물고기가 물 속에서 헤엄쳐야 갈증이 없듯이,
새가 하늘을 날아야 자유 하듯이,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행복하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떠나 있었던 저와 그대의 삶은 낚시에 걸려 뭍에 팽개쳐진 물고기 마냥,
늘 목말라 퍼덕이며 갈급하기만 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대와 함께 말씀의 바다를 헤엄치며 함께 진리의 여행을 떠나 보기를 원합니다.
그 여로에서 그대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답신을 기다리며
꽃바람 부는 사월의 첫 날에
그대의 영혼을 사랑하는 이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