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이어질 편지

함께 진리의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그대에게

언제나 그 자리에 2004. 6. 11. 22:27
 

편지.. 그 여섯번째..

 

 

여행이라는 말은 우리를 충분히 설레게 합니다.
우리에게 길들여져 있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그리고 사랑이든 애증이든 집착이든 우리를 붙잡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잠시 떠나 있는다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나' 속에서
'또 하나의 사랑'을 발견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숱한 세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해온 '진리',
그 진정한 실체를 알고 싶어 함께 진리의 바다를 향해 떠나고 싶다는 그대의 답신을 받던 날, 저는 황망히 여행가방을 챙겨 길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가까운 일본이지만, 지난 번 미국을 향해 떠날 때보다도 마음은 왠지 더 멀리멀리 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옛날이라는 표현이 우습지만,
제 자신의 완벽한 기질 때문에 삶의 무게가 저를 한없이 짓눌렀던 그 시절,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그래서 더욱 만나지도 못했던 그 힘겨웠던 시절에 저의 여행보따리는 마치 '이사가는 짐'처럼 저를 고되게 했습니다.

수주일 전부터 계획하는 여행 일정 속에서
-그 때는 해외도 아닌 국내여행이었는데도-밤잠을 안자고 수첩에 일련번호를 부쳐 준비할 물건을 빼곡이 적어놓고는 심지어 바늘쌈지까지 체크해가며 며칠동안 준비에 준비를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적어도 신발 종류는 세 가지, 하이힐부터 랜드로바, 운동화까지, 그 신발에 걸맞는 옷의 코디까지…, 그러다 보면 이삿짐이 되기가 십상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내면에 숨겨진 심리는 아마도 불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행여나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늘 마음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보니 뭔가를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래서 제 자신을 스스로 옥죄어 버렸던 것입니다.
 


더욱이 내 자신의 가치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늘 '남의 시선'에서 찾았던 저는 모든 이들에게 완벽하고 흠 없이 보이려는 노력 속에서 살아야했던 것입니다.
 
나의 정체성,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구인지,
그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열등의식을 위장하고자 하는 고달픈 몸부림이었지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유럽이든 러시아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저의 여행가방은 오직 하나, 한 손으로 번쩍 들리우는 작은 슈트케이스 하나 뿐입니다.
저는 그 여행가방을 들고 길을 떠날 때마다 제 삶의 무게가 그렇듯 간단하고 명쾌하고 가벼워진 듯 해서 늘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허울, 가면, 위장을 벗어버리고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사람 앞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제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집니다.
 

여행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저는 지금, 일본의 현란한 도시 동경, 그 중심에서 약간 비껴 앉은 이께부꾸로(Ikebukuro)의 한복판에서 저 아래로 빌딩 숲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그대에게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여행길 속에서 이렇듯 도시의 한복판에 짐을 풀어보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의 밤을 새워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깊고 깊은 밤, 몇 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사선을 그으며 지나칠 뿐, 저 아래 세상은 한낮의 분주함을 어둠 가운데 묻어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터입니다.


피부색이 노랗든, 하얗든, 검든, 영어로 말하든, 불어로 말하든, 일어로 말하든 결국 사람들이 고민하는 문제는 같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참된 길, 진리는 무엇일까.
 
그 고민은 이 땅 일본에서도 여전하여 8백 만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기도 하고 그 앞에서는 빌기도 합니다.
 

지금은 어린이날을 끼고 있는 일본의 황금연휴입니다.
호텔로비에는 남자아이의 건강을 기원하는 우상인 갑옷이 진열되어 있고 힘을 상징하는 종이 잉어들이 주욱 매달려 있었습니다.
무엇인가에 자신의 운명을 의지하지 않고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연약한 인생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경제대국을 이루고 있는 이 일본 땅,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좋은 것은 다 있다는 이 일본 땅에서도 역시 허무와 고독과 방황의 어두운 베일은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쭈욱 뻗은 히말라야 시다가 정결하게 서있고, 체리 핑크 색 철쭉이 몽실몽실 피어난 도심의 공원, 비둘기들이 평화롭게 연못의 물을 마시는 그 아름다운 곳에도 집이 없는 홈리스(Homeless)들이 지저분한 겨울모자를 눌러쓴 채 벤취에 힘없이 몸을 누이고 있었습니다.
 
가난이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정신적인 방랑자들입니다.
듣기로는 지식인들이 꽤 있다고 하는군요.
 
 


그렇다면 물질의 풍요와 상관없이 이들의 정신세계를 혼미하게 한 그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 비밀의 문은 오직 진리의 열쇠로만 열려집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리는 하나님 떠난 인생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만나는 길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곧 진리입니다.
그 분의 높고 넓고 깊은 비밀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곧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공자도 석가도 마호메트도 자신이 곧 진리라고 말하지 못했지만
 
오직 예수,
그 분만이 "내가 곧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요14:6).
그 분을 알고 믿고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인생의 긴 여행길에서 방황은 끝을 냅니다.
 
허무는 기쁨으로 채워지고 길고 어두운 베일은 걷혀집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힘을 낭비했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불경에 깊이 심취한 적이 있으셨다구요?
저 또한 대학에서 교양과정 중에 불경을 강의하시던 교수님의 명강의에 푹 빠져 불심에 대한 외경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철 스님이 생각나는군요.
진리를 물으러온 신도에게 "중x에게 속지 말라"며 도망했다는 그 유명한 일화를 남겼던 그 분은 진리를 찾으려는 몸부림 속에서 솔직함과 청빈함으로 살다 가신 분으로 기억합니다.
누더기 가사 한 벌로 심심 산골에 묻혀 사셨던 그 분이 무에 그리 죄가 많으셨든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남긴 열반 송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구나."
숱한 인고의 세월과 해탈을 위한 인간적 노력이 헛되이 무너지는 순간의 고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를 찾으면 하산(下山)하겠다던 그 분은 히말라야산의 열 두 배나 되는 죄업의 무게를 지고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그 죄업은 순식간에 십자가에서 해결되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진리를 만나지 못하고 진리의 주변을 맴돌았던 성철 큰스님의 영혼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 돌은 돌일 수밖에 없는데 우상을 만들어 부처를 신격화하는 불교의 교리 앞에서 그 분은 솔직하셨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저 또한 감히 성철 스님에 비견할 수 없지만 막연한 진리를 찾아 성당의 마리아상 앞에서, 친구가 새벽마다 목탁을 두드리던 원불교당에서 그 애 대신 목탁을 두드리며 커다란 원 앞에서 허리를 구부려 절하면서, 밤새 읽던 철학책 속에서, 자꾸만 저의 꿈과는 상관없이 비껴 가는 운명의 여로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힘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리,
그것은 막연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제 곁에 너무도 가까이 깊숙하게 다가와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단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저의 눈이 열리지 않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김포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고도를 높여가던 그 때, 구름바다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찬란하던 하늘 위의 하늘을 바라보며 먼 여행길을 떠났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 생각났습니다.
다만 먹이를 찾고, 가능한 한 살아남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동료 갈매기들의 미움을 사서 머나먼 유랑길을 떠나야 했던 갈매기 조나단. 바다 위의 짙은 안개를 뚫고 갈매기의 한계 속도를 극복하고자 비행 연습을 쉬지 않았던 그가 날았던 그 하늘이 바로 그 찬란한 하늘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우리가 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겨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의 목표는 배우는 일, 자유하는 일, 발견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진리를 배우고,
진리로 인해 자유하며,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 속에서 함께 여행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000년 5월 4일
동경에서 답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