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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이어질 편지

시월의 편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지를 묻는 그대에게

 


이곳, 보스턴도 가을입니다.

고국의 가을이 아름답듯이, 이 곳도 나무들과 꽃들이, 그리고 경쾌하게 잔디밭을 달리는 다람쥐들이, 부서지는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대서양의 은빛 물결들이 또 하나의 계절을 찬미합니다.

오늘은 바닷길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달리며 오랜만에 실컷 바다 내음을 즐겼습니다.
고국의 쑥부쟁이 대신 보랏빛 라벤다가, 하얀 들국화 대신 무더기로 피어난 데이지와 마가렛을 바라보는 기쁨 속에서 고향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 곳, 고향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즐겁기도 한 무수한 기억들이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이 곳 보스턴에서 많지 않은 날들을 머물렀지만 어느덧 고향 같은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들을 제 가슴에 담았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새벽이 푸르다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실감했습니다.
석양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혼자라는 고독함 속에서 두고 온 고국의 이웃사랑을 진하게 체험한 곳도 이 곳입니다.

또 하나, 새로운 시작이라는 단어가 제 인생의 여정 속에서 그토록 절실하게, 그리고 생동감 있게 다가온 곳도 바로 여기에서입니다. 

한 쪽 어깨가 짓무를 정도로 무거운 가방을 메고 곧 떠나버릴 것 같은 버스를 향해 릴레이 경기의 마지막 주자처럼 사력을 다해 달릴 때마다 여고시절, 백 미터 달리기 시험 칠 때의 체육선생님 얼굴이 떠올라 혼자서 슬며시 웃습니다. 

늘 여유 있게(?) 꼴찌를 맴돌았으니까요.

갑작스레 다가온 추위 때문에 손이 시려워 한없이 소매 끝을 끌어내리고 황량하게 바람 부는 전철역 벤취에 앉아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 마약에 취한 듯 초점을 잃은 시커먼 사람이 금방이라도 총을 뽑아 들 것 같은 모습으로 어둠 속에서 다가와도 이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보기와는 달리, 가늘고 작은 동양 여자에게 숨겨진 확신, 원대한 힘이 제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믿음과 기도의 비밀에서 온 힘이지 싶습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지를 물어오셨지요.
천성적으로 새로운 시작 앞에서 한없이 머뭇거리는 저로서는 너무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난(Born-again) 이후로, 시작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진행하신 분도 그분이셨습니다.

다만,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듯이 만만치 않게 세상을 다스리는 악한 영적 존재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시작부터 좌절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의지로, 철학으로 무엇인가를 시작해 보려 했던 위인들의 삶은 결국 허무와 실패로 그 종결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지 싶습니다.

에덴에서의 화평과 희락, 자유와 안식을 뺏어간 사탄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서 활동합니다.(창3장)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거짓말쟁이인 그 영적 존재는(요8:44)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리의 생각과 마음속에 파고들어 거짓말을 속삭입니다.

특히나 이성주의와 과학주의, 합리주의가 그 극치를 달리는 이 곳 보스턴에서 인간의 힘이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체험합니다. 

이성과 지성의 최고봉을 자랑하는 하버드의 광장 앞에는, 때로 삶에 방향을 잃어버린 홈리스들과 갖가지 이상한 종교에 빠져 집을 나온 청소년들이 집단으로 모여들어 거리에서 나뒹굽니다.

챨스 강변을 따라 늘어선 아름다운 집 앞에는 갖가지 허수아비와 흡혈귀, 악마들의 형상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이 달 말일이 그들이 말하는 할로윈(Halloween) 축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귀신들의 축제랍니다(Satan's dark dazzle). 

이들을 바라보면서 그 저변에 깔린 그들의 정신적 두려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멋있는 집에 살고는 있지만 밤이면 알 수 없는 것에 시달려 잠 못 이루고, 무기력에 빠져 무엇인가 짜릿한 자극을 필요로 하는 그들, 화목과 기쁨은 깨어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는 상실감에 젖어 살아야 하는 그들의 두터운 가면 뒤에 숨겨진 것은 '눈이 밝아진다'고 속삭이는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이에 맞서서 결사적으로 하나님을 믿어보려고, 곰팡이 낀 오래된 교회에는 잘 차려 입은 노인들이 모여들지만 도덕주의와 윤리주의로 여전히 율법의 노예가 되어 힘을 잃고 있습니다.

선(God's will)의 진정한 기준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you do well, will you not be accepted?)

그렇습니다. 여자의 후손(Her seed, 창3:15, 사7:14)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원죄(Original sin)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구원에 대한 피의 언약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가치 기준에 따라 예배 드리고 실패한 가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또는 상대가치를 도덕이라는 잣대로, 윤리라는 척도로 인식하게 만들어서 때로는 교만하게 이웃을 정죄하게 하고 때로는 낙심에 빠져 질투하고 미워하거나 힘을 잃어버리게 유도합니다. 

결국 인간이 한계를 절실하게 느껴 만들어 낸 것이 지성의 최고 도달점인 종교이며, 인간이 생각해내어 경배하는 우상이요, 신(god)이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뉴에이지 사상이나 열반의 경지에 이르러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불교의 교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탄의 속삭임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많이 닮아있는 인간들의 영적 몸부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대와 나.

새로운 시작을 향하여 힘차게 내딛었으니 오직 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당당하게 이 땅을 정복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정복은 진정한 다스림에서 비롯됩니다. 

진정한 다스림은 사랑을 기초로 할 때 완전합니다. 

그 사랑은 물론,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대속물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지금껏 그대와 나를 공허 속에 밀어 넣어 낙심케 했던, 그리고 때로는 강한 자아의식으로 교만케 했던 그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앞에서 완전히 결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의 삶에 주인이 되어 인도하실 때 우리의 능력과 환경, 지성과 배경에 관계없이 날마다, 걸음마다 우리에겐 증거(Testimony)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기준과 그 분의 방법으로 우리의 영혼을 무장할 때 우리의 시작은 정점을 넘어갑니다. 

행여 달려가는 길에 잠시 좌절이 오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또 하나, 기도의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하면 이루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도할 때 그 분은 우리를 진리로 자유케 하시고 참 평안과 안식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그날까지 그 분의 절대적인 관심과 사랑 속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증거를 누군가에게 전해주리라는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19:21)고 결심하고 복음 전파에 생명을 걸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오랜 날들의 광풍과 파도를 이기게 하셨듯이 말입니다(행27장).

꿈이라는 단어가 그대를 한없이 설레게 했다구요. 그대의 답신을 받고서 저 또한 미래를 향한 꿈으로 행복했습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여름날의 그 뜨거움을 견딤으로써 튼실한 열매를 맺어가는 나무들처럼,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 순백의 베일을 쓴 가을 신부처럼, 그렇게 주님이 주신 성화된 옷을 입고 아름다우면서도 힘있게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창조주이신 그 분이 부탁하신 말씀, '땅 끝까지 나아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는 그 음성을 가장 선명하게 들은 수 있는 그 자리에 늘, 그대와 나, 서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분은 근심스레 우리를 부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2000. 9. 4.
보스턴에서 답신을 기다리며
그대의 영혼을 사랑하는 이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