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세상에서 젤 무서운 존재가 사람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어두운 밤길에 들짐승을 만나는 것 보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라고들 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만큼 오묘한 존재가 없습니다.
무궁무진한 창의력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넘나드는 것 같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목숨을 버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자신의 유익이나 감정에 상관이 없을 때는 무섭게 차가워지거나,
혹은 상대방의 목숨을 노릴 만큼 잔인해지기도 합니다.
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처럼 정의로운 것 같이 행동하지만,
사랑의 법과 공의 법을 동시에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에 무게를 두면 공의가 기울어지고, 공의에 무게를 두면 사랑의 법칙이 손상을
입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는 사람이 꽃 보다 더 아름답게,
새들 보다 더 자유하게, 그리고 죽음보다 더 큰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낙원의 법칙,
곧 에덴의 법칙이 있습니다.
에덴의 법칙,
그 첫 번째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며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째 날 쉬신 것은, 피곤하셔서가 아니라,
그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거룩의 명사형이 히브리어로 코데쉬인데, 분리, 차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날인 안식일을 세상 사람들과 구별하여 예배로 지킬 때,
우리는 에덴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오해한 것은 주일 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를 드려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기분이 좋으셔서 복 주신다고 착각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가복음 2장 27,
28)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무엇을 차단하고 분리시키기를
원하셨을까요....
바로 그것은 만물이 창조되기 전 이미 존재하였던 어둠과 공허와 혼돈의 세력인
사단의 영향권에서 우리를 분리해 놓으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창세기 1:2, 계시록
12:9~12)
하지만 인간은 그만, 뱀 속에 들어간 간교한 사단의 꼬임에 빠져 낙원을 상실합니다.(창세기
3장)
따라서 실낙원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사단의 세력을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의 날, 예배를 통해서 확인 되고, 우리의 삶과 영혼이 쉼을 누림으로 복을 얻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흙(dirt)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생령 (A living soul)이 되었다는 말은,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낱 먼지(dirt)일 수 밖에 없었던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숨, 즉 호흡이 우리 안에 불어 넣어 졌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만 호흡을 불어 넣으셨을까요...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자신의 계획에 의해 지어진 존재인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셨고, 함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반드시 영적인 존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없는 원숭이와 진돗개는 아무리 영리해도, 영적인 세계에 대해 고민하거나
인생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못합니다.
그저 썩어질 흙덩어리로만 지어져서, 먹고 자고 배부르면 그렇게 살다가 썩어
없어집니다.
좀 극단적인 표현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영적인 예배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만나 주신 사마리아 여인은 당시 유대율법에 의하면 비천한 창녀요,
이방여자로서 개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한복음 4장19~20)
비록 세상 사람들의 잣대에 의해서는 죄인으로 정죄되어 살고 있던 여인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셔야만 했던 (had to go) 당연한 이유는
올바른 예배에 대해 질문을 가지고 있던 그 여인에게 에덴의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에덴의 법칙 그 두 번 째는 남자와 여자가 누리는 혼인의 법칙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감격하는 사랑의 환호성은 에덴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창세기 3장에 출현한 사단의 궤계에 속으면 그 감탄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바로 이 여자 때문’이라며 온갖 불평을 늘어놓으며 책임을 전가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남자들의
속성입니다.
이 때, 가정은 깨지고 그것을 보고 자란 후대인 가인과 아벨은 미워하다 못해,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낳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서로 사랑하되,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의 하나로써 요즘 신세대들의 일부는, 결혼은 했는데 부모를 못 떠납니다.
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주변을 맴돕니다.
그래서 마마보이라는 말도 생겨나고, 겉보리 서 말 만 있으면 처가살이 하지 말라는 교훈도
있습니다.
화장실하고 처갓집은 멀어야 한다는 심한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하긴 어렸을 때부터 독립성 없이 부모의 집착과 간섭 속에서 자란 자녀들이고 보니 무엇 하나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할 힘이 없어서 일 것입니다.
이런 후대들의 결혼 생활은 늘 좌충우돌하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도움만 받으며 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십계명은 어떻게 지키라는 말일까요.
부모의 집貶【?떠나지 못하고 평생을 기대서 사는
것과 효도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체결된 은혜계약을 지키는 것이 곧 에덴을 누리는
법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