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해 준비하기를 소망하는 그대에게 그리운 서울을 향해, 보스톤의 추억을 한데 모아 분주히 짐을 꾸리던 그때 받아본 편지의 한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그대의 빈자리를 바라보노라면 원래 없었던 사람 같기도 하고, 있으면 흐르고 넘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군요.
서울이 그리웠던 이유는,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깨우침을 얻게 한 편지였습니다. 그 깨우침이 그리움이 되어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시베리아의 설산(雪山)들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을 받아 단정하면서도 기품있게 그리고 균형과 조화를 동시에 이루어내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예술감각, 그 경이로움 때문에 오랫동안 작은 창문에 얼굴을 대고 하늘 아래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완전한 평안 - 그리움마저도 사라지고, 기대감마저도 물러가 버린, 어떤 감정 하나도 튀지 않는 - 모든 것이 그저 단아하고 평화롭게 다가오는 절대평안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듯 귀한 시간에 가장 귀한 일을 하고 싶어 성경을 펼쳤습니다.
무심코 읽어 내린 여호수아서는 첫 줄부터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둔 박진감과 소망, 그리고 새힘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며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는 즉시 백성의 유사들을 불러 명령합니다.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여호수아 1:11)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시작한 것입니다.
준비라는 말은 우리를 설레게 하기도하고 조금은 긴장도 하게 합니다.
준비라는 말 속에는 이미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호기심, 기대감 같은 것이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기 위해 준비했듯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아니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이 심어주신 명백한 꿈의 성취를 위해 「준비」하리라는 결심을,
늘 지니고 다니는 수첩에 깨알같은 글씨로 적어 넣는 것으로 제 자신에게 확인시킨 뒤, 가슴 뛰는 설레임으로, 그리고 자신을 향한 다짐으로 힘있게 내려딛은 서울은,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는 대신, 이미 이웃들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저를 기다리고있던 그대의 답신은, 이미 영혼으로 교감하는 듯, - 제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를 이미 아는 듯 - 미래를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묻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애써 부인하면서 세상의 초등학문과 수없는 의문들의 밭에 생각의 씨를 뿌리고, 삶의 경험으로 물을 주고,
지식의 비료를 뿌리고 그리고는 결론을 잔뜩 수확하여 고정관념의 창고 속에 쌓아두고 흐뭇해하던 그 정신적인 활동마저도 결국 영적인 것 앞에서 한낱 육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바벨탑이었음을 알고, 이제는 과감히 부수어 버릴 용기가 생겼다는 그대의 답신을 읽어 내리는 순간 진리 앞에 선 그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쁨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그 용기로 이미 새로운 시작의 행진을 하고있는 그대, 어떻게 시작해야 함을 알았고, 이제는 주님의 아름다운 선율을 내는 귀한 도구로 쓰여지기를 소망하는 이때,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묻는 그대의 진지한 물음 속에서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합니다. 그전의 슬픔과는 질이 다른, 평화를 동반한 슬픈 기운 같은 것이 감도는 새벽에 이 글을 쓴다는 추신과 함께 덧붙여진 내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법칙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법칙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런 생각을 기뻐하시는 듯 주님은 성경에 이런 말씀을 적어 놓으셨군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것으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어다'(롬1:20)" 요즈음은 그대의 답신을 대할 때마다 월반하는 천재 아이의 경이로움을 보듯 신기하고 놀라울 뿐입니다.
앤티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며, 지적인 탁월성과 정신적인 고매함을 받쳐주는 철학을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우면서도, 갈 길을 몰라 광야에 서있던 그대의 변신이 눈부실 정도로 화사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준비, 더욱이 하나님의 소원이 그대의 꿈이 되어 나아가야 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그리고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 위해 행군에 나서는 그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싸움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선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환경과 상황으로부터 오는 모든 불신앙과 좌절, 낙심과 싸워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대의 모든 환경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계획과 뜻을 찾으려 할 때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요한복음 8장 22절)
그대의 생각, 고정관념의 틀을 깨어버리고 그대 영혼의 주인 자리에 주님이 계실 때(갈라디아서 2장 20절) 자신을 완벽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세상과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을 구원코자 하심이었습니다.(요한복음 3장 16절) 그러나 우리에겐 세상의 윤리와 세상의 지식, 기준들이, 우리에게서 진정한 평안을 빼앗아 가곤 하기 때문에, 그대와 함께 거하시는(dwell)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함께 그대와 함께 계실 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는(요한복음 14장 26-27절) 지혜와 분별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자 속이는 영적존재, 사단과 싸워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땅 끝까지 나아갈 때(마가복음 28장 18절) 마귀의 일을 멸하러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요한일서 3장 8절) 그분의 이름으로 그대를 승리케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싸움을 위해 길러야 할 다섯 가지 힘, 그것은 여호수아가 진중에 다니며 양식을 예비하라고 명령하였듯이, 그대가 꼭 지녀야 할, 없어서는 안되는 양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권능, 그로부터 오는 영적파워는 사단과 세상과 자신을 능히 이기게 합니다. 또한 세상의 초등학문을 정복하고 모든 사건과 상황 속에서 정확히 분별 할 수 있는, 그리고 미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의 힘을 얻기를 간구했습니다.
체력도 필요합니다. 팔십오세에 아낙산지를 점령했던 갈렙처럼 강건한 체력이 있을 때 고지를 향해 힘있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있는 존재니까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또 하나 경제력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이사야 45장 2-3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감추어진 은밀한 보화는 일어나 빛을 발하는 자에게 주워지는 당연한 상급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에 방향 맞출 때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해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누려야 할 축복, 그 위대한 힘은 만남의 축복입니다.
곧 사람으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장 19절)"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참된 제자로, 그리고 그분의 귀한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어디에 가든지 꿈과 힘으로 넘쳐날 때, 지위,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이를 친구 삼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복음 안에서의 만남은 생명적인 관계로 맺어지는 신비스런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갈등이나 시기나 다툼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아가페적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예수님의 온 인류를 향한 사랑,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닮아가는 것이겠지요.
조그만 지구를 속속들이 들뜨게 했던 새천년의 시작이 묵은 시간으로 접어드는 십이월입니다. 그대의 삶에 다가올 아름다운 시간을 위해(For better times in the future) 함께 준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 귀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
이천년의 십이월, 새해를 기다리며 그대의 영혼을 사랑하는 이로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