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르는 놀이 “기절놀이”
“사단은 창3:15절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그 머리가 박살 나 얼굴이 없기에 항상 얼굴마담을 갖다 댄다”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정말 맞는 말이라며 속으로 맞장구 치던 생각이 난다.
그렇다. 사단은 하나님 자녀를 절대 이길 수 없기에 얼굴 마담을 들이대며 속인다.
사단의 수많은 얼굴 마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문화”다.
사단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그래서 비슷한 것을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린다.
즉 사단은 우리에게 절대 ‘기쁨’을 가져 다 줄 수 없기에 대신 ‘재미’를 가져 다 준다.
그리고 ‘평안’을 줄 수 없기에 대신 ‘편안’을 가져 다 주며, ‘정복’을 할 수 없기에 잠시의 ‘성공’을 가져 다 준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을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자신의 전략을 문화 속에 그대로 녹여 후대들의 삶을 세상의 타락과 멸망 속으로 사로잡아 가는 것이다.
요즘 일명 ‘기절놀이’라는 것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얼마 전에 제주도의 모 중학교에서 ‘기절놀이’로 인해 한 남학생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것을 언론에서 일제 보도하여 우리에게 충격을 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놀이는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공공연하게 청소년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놀이었다.
많은 청소년들은 귀신을 부르는 놀이인 ‘분신사바’와 함께 학원가에서 좀처럼 사라지기 어려운 놀이로 이 ‘기절놀이’를 뽑기에 주저함이 없을 정도다.
'기절놀이’는 숨을 참은 상태에서 신체의 한 부위를 누르거나 급소 때리기, 생일빵, 과호흡 상태에서 급소 때리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어느 청소년의 말이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손으로 입 근처를 막고 숨 가쁘게 10번 넘게 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손으로 가슴에 X자를 만들라고 하더군요.
무슨 영문인줄 몰라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데 갑자기 친구들이 강하게 제 가슴을 미는데...
정말 머리가 빙빙 돌며 이상해지더라 구요. 나중에 알았죠. 그게 기절놀이 라는 것을요.”
한 여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때는 무식하게 했어요. 그냥 목을 졸랐어요. 그 애가 다리를 동동 구를 때까지...
여러 번 친구한테 해봤는데, 그 친구 말로는 그렇게 짜릿하대요. 오줌도 쌌는걸요.
어떤 친구는 계속 해 달라 해서 어떤 때는 연달아 세 번을 해 준 적도 있어요.”
이 같은 ‘기절놀이’로 인해 뇌에 산소공급이 제대로 안될 경우 뇌 장애가 올 수 있을 뿐 아니라 급소를 잘못 때리거나 목을 누를 경우 질식사할 가능성도 있다며 많은 전문가들은 우려를 표한다.
이러한 신체적 위험뿐만 아니라 학원 폭력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3~5명이 한 조가 돼 한 학생의 급소를 때리거나 호흡을 멈추게 하는 형태로 이뤄져 힘이 약한 학생이 타깃이 됨으로써 새로운 집단폭행 형태를 띠고 있는 실정이다.
‘기절놀이’가 더 무서운 이유는 청소년들이 환각 상태가 좋아 이 끔찍한 놀이를 주저함 없이 한다는 것이다.
‘기절놀이’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지금까지 학원가에 돌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기절놀이’ 속에서 환각 상태를 경험한 청소년들 가운데 많은 아이들이 환각 속에서 버스나 기차 등이 와 멈춰 선다고 한다.
청소년들은 이야기 한다.
그 버스나 기차를 타면 죽는다고. 그 버스와 기차는 저승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이야기 또한 학원가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청소년 현장에 왜 이런 놀이들이 유행할까? 사람을 기절 시키는 ‘기절놀이’를 비롯해서
검은 테두리의 액자에 멀쩡한 친구 얼굴을 집어넣고는 곡을 부르는 ‘상주놀이’,
죽은 척하여 사람을 놀래 키는 ‘시체놀이’ 등등...
이런 끔찍한 놀이들을 우리 청소년들은 단 하나의 이유로 즐기고 있다.
‘재미있다’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렇다. 사단은 우리 청소년들에게 ‘재미’를 주고 있다.
교회는 재미없으니 가지 말라고 한다.
'편안'을 갖다 대면서 일요일만이라도 편하게 보내야지 힘들게 교회 왜 가냐고 한다.
그리고 6일 동안은 잠시의 ‘성공’에 청소년들을 묶어 놓고는 복음 받을 기회조차 뺏어가려고 한다(창3:1-6).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간다(요8:44).
결국 이렇게 해서 청소년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롬3:23).
‘문화’라는 얼굴 마담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나 ‘재미’와 ‘편안’과 잠시의 ‘성공’은 우리 청소년들로 하여금 더욱 마음의 갈증만을 부추길 뿐이다(마11:28).
우리 청소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복음의 참된 안식과 평안이다.
복음의 빛이 우리 청소년들에게 비치지 않는 한 이러한 놀이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절놀이, 상주놀이, 시체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단어들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란 제목 아래
“후대를 살리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나라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스데반처럼 순교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순교정신으로 후대들에게 복음을 전달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기억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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