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래 이어질 편지

하나님도 웃게 하는 축복덩어리 야곱

 

하나님도 웃게 하는 축복덩어리 야곱

(성경을 통해 보는 복음 - 서른한 번째)

 

 

첫눈에 반한 여인 라헬을 불같이 사랑하여 칠 년 노예살이를 칠 일같이 해치우고, 그도 모자라 사랑 없이 정으로 사는 레아를 내칠 수 없어 기꺼이 칠 년을 더 해, 기나긴 십 사년 동안, 이기주의자 삼촌 라반의 노동착취를 그저 말없이 견뎌 온 야곱의 마음은 한이 맺혀 뭉그러져 있었을 터입니다.

열 번씩이나 품삯을 속이는 삼촌의 간교한 술수, 시기와 질투로 끊임없이 시비를 붙는 두 여인, 거기에 그녀들의 하녀 둘까지 합세하여 쟁쟁거리는 피곤한 가정사, 머리를 싸매고도 남을 험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집 떠나와 오래도록 양치기 목동이 되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야곱의 영혼에는,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도는 구릉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나무들과 그 나무들 사이로 무리 지어 풀을 뜯는 양들의 행렬 속에서 체질적으로 타고 난 낭만과 여유로움, 그리고 환란 중에 벧엘에서 만나 주셨던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부터 비롯된 성실함이 깊숙이 배어있었습니다.

 

 

 
영특함과 정직함으로 일한 그의 공력과,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삼촌의 재산은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나 어느새 구십 세가 넘어버린 자신의 소유는 이렇다 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라헬의 몸을 통해 마침내 요셉을 얻은 야곱은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고향 본토로 돌아가기를 소원하지만, 확실하게 경제적 가치가 있는 조카를 호락호락 놓아줄 삼촌이 아닙니다.

 
라반은 비열한 웃음 속에 계산속을 감추고 재협상을 시도합니다.
“…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것을 내가 알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창세기 30:27~28)

이미 여러 차례 속은 바 있는 야곱은 그동안의 경험과 재치를 발휘하여 삼촌이 생각하기에 터무니없다할 만큼,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현재 있는 양이나 염소 중 아롱진 것 검은 것은 다 가려내 삼촌이 가져가면, 그 나머지를 자신이 치되, 하얀 것들 중에 아롱이다롱이 점박이 양이나 염소가 나오면 자신의 소유로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양치기 양 자도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말이 안 되는 계약조건이지만, 약삭빠른 라반은 그나마 아롱이다롱이들을 빼내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주어 야곱의 남은 가축들과 사흘 길 쯤 먼 곳으로 보내버립니다.
말하자면 야곱의 가축들 중 단 일 퍼센트도 아롱진 것들과 교미할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 아롱이다롱이 검은 것의 씨를 말리리라, 야비하게 잔머리를 쓴 것입니다.

이때부터 야곱의 유전자 변이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그 방법이 하도 희한해서 하나님도 웃으실 정도입니다.
실제로 라반의 계략과 야곱의 고군분투를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천사를 파송하여 양들의 교미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알려주십니다. (창세기 31:11~12)

 
어쨌든 야곱은 버드나무 살구나무 플라타나스 나무들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껍질을 벗기고 흰 무늬를 알록달록 만들어서 하얀 양들이 와서 먹는 물구유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알록달록 가지를 바라보며 새끼를 밴 튼실한 양들은 하나같이 아롱이다롱이 새끼를 낳았습니다. 비실거리는 양들은 라반의 양으로 분류하여 껍질 벗긴 나뭇가지를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니 무늬가 없이 태어납니다.

 


극심하게 일교차가 바뀌는 하란 땅에서, 낮에는 땅이 갈라질 정도의 폭염이 내리 쪼이고 밤에는 영하로 뚝 떨어지는 추위 속에서도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온 육 년 동안의 결실로 드디어 야곱은 거부가 되었습니다.(창세기 30:43, 창31:40)

 
그러자 라반의 안색이 변하고 그 아들들은 야곱이 아버지의 소유를 빼앗았다며 시비를 걸어옵니다. 이 때, 야곱은 자신의 아내 레아와 라헬을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 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창세기 31:5~9)

 

 



이로써 야곱의 삶에 제 2의 도주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소유를 챙겨,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틈을 타 가만히 밧단 아람을 떠났습니다. 어차피 고이 보내줄 라반이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시간표와 축복은 때로 고난이라는 껍질로 위장하고 찾아옵니다.
 
삼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을 통해 핍박이 조여 와 도망치는 것 같지만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가나안 복귀, 곧 메시아, 그리스도가 나실 언약의 땅, 축복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실 속에 펼쳐지는 상황들이 불리하게 전개된다 할지라도 언약의 사람들이 놀라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이십 여 년의 고달픈 노예 살이 속에서도 오직 그가 놓치지 않았던 벧엘의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근원적인 축복을 그대로 부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야곱의 행위나 인격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두 가지가 아닌지 싶습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가.

 
그리고 그 메시아,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인생 문제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유일하신 분임을 믿고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전통과 규례와 율법에 매여 자신들의 기준대로 메시아를 정죄하고 무시하는 유대인 바리새인,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사마리아의 이방 여인, 기구한 운명 속에서 어떻게 해야 메시아를 만나, 끝없이 목마른 자기 인생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이 넘쳐흐를지…, 고민하고 기다리는 여인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요한복음 4:4~42)

 

 


야곱이 그랬습니다.
때로 자기 꾀에 휘말려 도망자의 신세가 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랑에 빠져 시간낭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잔꾀를 써서 아롱이다롱이 만들어 내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리스도, 메시아 앞에 무릎 꿇는 그의 경외심과 더불어,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피의 예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께 드려졌던 언약적 예배가 아니고는 절대로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유일성 신앙은 그를 축복덩어리로, 언약의 성취자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고도 남을 승리자로 거듭나게 하는 데 충분한 것입니다.

 


행여 요셉에게 장자권을 줄 수 있지나 않을까 엉뚱한 꾀를 쓴 라헬이 훔친 드라빔을 빌미 삼아 야곱의 귀향길을 저지하러 칠일 밤낮을 추격해온 라반을 향해 하나님은 ‘선악 간, 야곱에게 무슨 짓을 하든 조심하라’ (‘Be careful what you do to Jacob, whether good or bad.’ The Message 창세기 31:24))고 오히려 따끔하게 경고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만을 편애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이미 어머니 리브가의 태에서부터 언약으로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축복의 길이 없음을 알고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늘어질 만큼 언약적 한이 있었던 야곱,

고독한 도망자의 길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사랑했던 그를…,

어떻게 버려 둘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