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래 이어질 편지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 그 두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는 그대에게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서울을 향해서 유럽여행을 마치고 화급히 돌아오던 그날,

신년카드들 속에 숨겨진 그대의 하얀 봉투를 발견하는 순간 반가움과 기쁨이 내 마음에 가득히 넘쳤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그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이 자신을 사랑하기까지 한다는 그 믿어지지 않는 허구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라는 짤막하고도 도발적인 그대의 답신을 읽어 내리는 순간,

어린 시절의 겨울날 장난 삼아 푸른 핏줄이 드러난 손목 위에 올려놓은 살얼음 조각에서 짜릿하게 스며들었던 고통처럼 잠시 내 가슴을 파고드는 고통이,

마치 면도날에 베인 양 가슴 한켠을 스쳐지나갔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대에 대한 원망의 감정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미처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실감 속에서 영원히 사랑 받지 못하는 자로 남겨질 뻔한 내 인생의 뒤안길을 잠시 돌이켜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복자(眞福者)'라는 따위의 구태의연한 성경구절은 아예 인용도 하지 말라는 그대의 경고는

아마도 지금까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온 상처에서 비롯된 예리한 반응임을 알 수 있어 더욱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더욱이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네의 주장 따위는 자신에게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으니 성경은 아예 접어놓으라는 그대의 주문에서

숨막히듯 절실한 그대의 절망을 엿볼 수 있어 가슴 한켠이 더욱 뭉클해옵니다.


조용하고 침착한 그대는 무엇이 그리도 분노하게 했습니까.



인생을 성실 하나로 살아왔다는 그대,

오직 도덕적인 기준 아래서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왔다는 그대의 작은 몸뚱이 하나를 도대체 어떤 세상이 그리도 야멸차게 고독의 늪 속으로 내몰았습니까.



가을에 피어난 들국화 한 송이로도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던 그대의 무소유(無所有)의 미덕을 누가 그리 짓밟았습니까.



그대를 휘감고있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눈으로 보이지 않듯이 하나님의 존재도 분명히 보이지 않습니다.

굳이 설명을 붙인다면 그분은 '영'(Spirit)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삼 년 전이던가 중국에서 만난 한 자매가 생각납니다.

한국보다는 다소 열악하지만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춘 심양(Shenyang)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고있는 그녀는 의사의 딸로서 상당히 재능도 있고 재력도 있으며 장래도 촉망되는 아가씨였습니다.

역시 교직에 있는 십여 명의 자매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가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내 인생의 어둠을 걷어내고 참 빛으로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때에 날카롭고 냉담한 눈초리로 저를 노려보던 그녀가 발악하듯 말했습니다.



"예수가 보이요?"

 

물론 15세 이하의 어린이에게 특정 종교사상을 가르치면 불법이 되어 추방되거나 교직에서 쫓겨 나야하는 공산주의 사상에 얽매여 살아온 이유도 있었겠지만

거의 광신에 가깝도록 삼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있다는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물론 예수님은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함께 계심으로써 나의 마음과 생각과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만일 공안당국에서 안다면 난 당장 잡혀가서 감옥살이를 하거나 모든 걸 빼앗기고 추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용감해서도 아니고 담대해서도 아닙니다.

그분이 날 사랑하시고 지키신다는 확신이 그 동안의 나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로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그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틀을 저와 함께 더 보내고는, 서울로 돌아오는 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서울에 가시거든 좋은 일 많이 하시라요, 나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디요."

암울하고 짜증스러웠던 그녀의 삶이 바뀌어 지금은 일본유학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그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겠죠.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저의 첫 주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 인생에서 성경 말고 가치관과 인생관을 정립하는데 영향을 끼친 책 중의 하나가 있다면 쌩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입니다.

그대도 잘 아시겠지만 그 책의 첫머리는 코끼리를 삼켜버린 아프리카 보아 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원래 화가가 되고 싶었던 작가는 모자처럼 생긴 보아 뱀, 코끼리를 삼켜서 가운데가 불룩해진 뱀 한 마리를 그려서 어른들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으흠, 그것은 모자군!"

 "모자가 아니에요. 이 속에는 코끼리가 들어있어요."

"웬 코끼리? 이것은 모자 아니냐?"

아무리 설명해도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한 채, 오히려 "너는 그림 그리기엔 틀렸으니 생각을 달리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결국 작가는 화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비행사가 되고 말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경비행기가 사막에 불시착하게되고, 그곳에서 푸른 망토를 걸친 금발의 아름다운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어린 왕자, 그가 그려달라는 양 한 마리는 주문이 너무나 까다롭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양이 들어있는 두 개의 구멍이 난 상자를 그려주게 되죠.

그때 어린 왕자는 별빛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웃음소리로 즐거워합니다.

바로 그 상자 속에 자기가 사랑하는 장미꽃과 놀아줄, 바로 그 양이 들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커다란 보아 뱀 속에 코끼리가 들어있듯이, 그 상자 속에 예쁘고 포동포동한 어린 양 한 마리가 들어있듯이

 

"내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가 있겠구나."

 

그 뒤에 어린 왕자가 그 비행사에게 들려준 천국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친구를 사귀는 나의 기준이 되어있습니다.

그가 몇 평 짜리 아파트에 사는지 아버지의 수입이 얼마인지, 나이는 몇 살이고 키는 얼마나 되는지는 알아보려고 하지 말고,

그가 희귀한 우표를 수집하고 있는지, 그가 사는 빨간 양옥집 창가에는 빨간 제라늄이 피어있는지를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읽은지 오래된 터인지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결코 보여지는 것으로부터가 아닌 내면에 자리 잡아 숨겨진 아름다움으로부터,

그리고 보여지지 않는 것으로부터 고귀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교훈으로 이해되어 내 머릿속에 간직해두었던 터입니다.



그대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대의 겸손 속에 감추어진 무서운 교만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이나 상황에 대한 무조건적 비하가 아닌,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대가 인정해야 할 사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틀림없이 살아 계신다는 것이며,

또 하나의 사실은 그대의 마음과 생각과 삶을 멸망시키고 도적질하고 훔치는 악한 영(evil spirit)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대의 요구대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해석은 제쳐두고라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운명이나 팔자에 빠지게 함으로써 멸망시키는 어둠의 세력은,

바로 우리의 땅을 뒤덮어 정신세계를 송두리째 콘트롤(control)하는 150만의 무속인과 역술인들,

각종 이단사상과 기(氣)운동 같은 것 속에 파고들어 우상을 섬기게 하고 점을 치게 하고 굿을 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무당이나 점쟁이가 귀신들려 작두 타고 점치는 것은 인정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는 귀신의 세력은 도대체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인생의 근본문제,

즉, '인간은 왜 모두가 불행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해답은 비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써내려 가다보니 다소 저의 어투가 격앙되고 말았군요.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대만큼이나,

지식과 철학과 윤리와 도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갈등하고 고민하며 살았던 옛적의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해 얻어낸 저의 사실적인 체험이요 증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군요.


저는 유년의 시절부터 청년의 시절까지 '천주교'의 교리 속에 갇혀서 살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계실거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신부님과 수녀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그야말로 천주(天主)님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에만 계실 뿐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사는 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그대보다도 더 강퍅하고 피폐해진 마음으로 청년의 시절을 보냈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의 서신에서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대의 갈등은 어쩌면 내면으로부터 오는 신(神)에 대한 열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실체를 잡을 수 없어 괴로운 것이겠지요.

같은 길을 걸어온 제가 그대와 함께 걸어갈 것을 약속합니다.

 

광야에 서 있는 그대와 함께 말입니다.



제 답신을 받는 그날 밤에는 마당에 내려서서 밤하늘을 올려 보십시오.

요즈음에는 서울에서 별무리를 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어서 유감이긴 하지만,

하늘 저편에 숨겨진 수 천억 개의 무수한 별들이 은하계를 이루는 광활한 하늘을 바라볼 때

태초로부터 창조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 그대 가슴에 전해오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대의 영혼을 그리워하는 이로부터
2000년 1월 3일
답신을 기다리며